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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Feb 14. 2022

친구의 고백

 고백은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반지를 준비하거나 학 천마리를 접을 수는 있지만 반지의 본질도, 학 천 마리에 담긴 뜻도 결국은 마음이다. 마음을 선물하는 일은 어렵고 마음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다. 상대의 방안에 놓이는 것도, 창고 안에 보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건 내 마음에 너의 마음을 들이는 것이다. 치운다고 잊히지 않을 흔적을 내 안에 남기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친구였던 애가 뜻밖의 고백을 해온 적이 있다. 평소 눈치가 빠른 나는 호의를 넘어선 애정을 예민하게 감지할 줄 안다고 믿었던 터라 많이 당황했다.  '애는 내 센서를 어떻게 통과한 걸까. 사랑의 힘인가? 얼굴에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단순한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뛰어난 연기력에 살짝 감탄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쁠 리는 없었지만 돌려줄 게 없는 처지에 받는 고백은 무거운 빚과도 같았다. 예상치 못한 마음을 안 것만으로도 난감한데 어떻게 하면 친구의 상처를 최소화할 것인지의 수까지 생각해야 돼서 입도 떼기 전에 진이 빠져 버렸다.


 망설이던 몇 초 동안 가볍게 흘려보냈던 지난 시간이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복기되었다. 무해하게 건넸던 인사와 친밀함에 나눴던 대화. 고마움에 건넸던 사탕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이중적인 의미를 품은 채 서로에게 다르게 해석되었을 시간들. 추리소설의 마지막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충격적이었고 오해의 여지를 남긴 건가 싶어 미안해졌다. 어제까지 친구였던 애가 하루아침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 나타나자 이제 그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한 건 좋았던 시절은 다 끝나 버렸고 아무리 좋게 말해도 거절은 거절이라는 것이었다.


 

 관계의 미래를 아는 내 마음이 먼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은 애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우정뿐인 내 마음이 더 작은 거라고 물러서기는 싫었다. 우정보다 사랑이 큰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뜨거움 면에서는 덜할지 몰라도 지속성 면에서는 지지 않는 편인데...  애랑 이런 식으로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나랑 가까워지자고 내민 손짓을 밀어내느라 영영 멀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남녀 관계의 종말이 연인이거나 남남이 아닌 다른 방향일 수는 없는 걸까. 


 우정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게 들었다. 관계라는 게 내 쪽에서 정의 내린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내 편의대로 주문할 수는 없는 거지만... 너와 나의 사이가 이럴 수 있다면 이제 어떤 관계도 믿을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이 이로써 사라져 버렸다. 이후로 남녀 관계에 대한 온갖 쿨 한 주장에 대해 시니컬해졌다. 그런 쪽의 편견이 완고해지고 말았다.


 마주 앉은 식탁이 이루고 있는 평행선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이제 우리 사이는 평행선을 달리게 될 거였다. 서로 볼 일 없지만 의식은 하면서 살아갈 평행세계. 각자 문을 열고 나온 이후의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대하는 일과 남자를 대하는 일에 미묘한 구분을 짓기 시작한 것.


 그 애가 내 세계에 남긴 선명한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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