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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Oct 28. 2019

김지영이 동백이보다 힘들다는 게 아니라요

#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50년생 김숙자면 몰라도.
 여자로 태어나 온갖 혜택 다 누리는 김지영이 대체 뭐가 힘들다는 거냐?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의견 중에 만 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으며 베스트로 오른 댓글이었다. ‘50년생 김숙자’씨의 기구한 사연 앞에서 ‘82년생 김지영’의 고충은 배부른 푸념으로 전락하였고, 나 역시 성차별로 치면 가장 극심한 차별을 받았던 우리 어머니 세대와 그 이전의 할머니 세대를 생각하니 잠시 숙연해지고 말았다.


 김지영은 김숙자에 비하면 ‘상팔자’에 속할지도 모른다. 고등교육은 언감생심. 남편이 바람을 피우든 폭력을 행사하든 죽으나 사나 자식만 바라보고 희생하며 살았던 김숙자에 비하면 말이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대학 교육을 받고, 청소기와 세탁기를 갖추고 있으며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 갈 수 있는 80년 대생들이라니! 시대를 잘 만나 지위 상승을 누리는 여자들이 감사는커녕 자기의 처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니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에 ‘비하면’ 우리나라 여성의 지위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게 사실이다. 대한민국 경제가 초고속으로 성장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초고속 성장에 따르는 결함과 보완점이 남아있듯이, 여성문제 역시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 문제는 고치면 되는데. 문제는 우리나라가 가장 못 살았던 시기와 가장 잘 살았던 시기를 동시에 겪은 세대, 여성들이 하대 받던 시절과 목소리를 높이는 시대를 모두 겪는 이들에게는 획기적인 발전이 가져다준 환희에 가려 현실적인 문제가 축소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발전의 폭이 급격히 커져서 예전보다 나아 보일 뿐, 현재의 상황이 최선의 결과라는 뜻은 아니다.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나 남자들에게는 원래부터 당연했던 일이 여자들에게도 주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혜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거기다 이 모든 혜택에 대한 감사로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에 대해서까지 눈감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저 정도면 꽤 괜찮은 환경 아니야?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본 남편은 주인공 김지영의 환경이 열악했다면 그녀의 힘듬에 대해 더 깊게 공감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자상한 남편과 먹고 살기 어렵지 않은 가계형편, 딸의 마음을 이해하는 친정어머니가 있는 조건에서 괴로워하는 김지영의 심경이 완전히 와 닿지는 않았나 보다. 그러면서 차라리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처럼 고아원에서 자라 미혼모가 되어 주위의 괄시를 받으며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설정이었다면 더 공감할 수 있었을 거라고도 했다. 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동백이도 힘들지. 그렇다고 지영이가 안 힘든 건 아니야.



 등급을 나누어 그중에 1등급에 해당하는 고통만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의 발전이란 ‘고민의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고민의 항목은 세분화되고 세세해진다. 신경질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분위기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전에는 덮어두고 넘어가던 문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다는 건 사회가 그만큼 고차원적인 고민을 해결할 만큼 성숙해졌다는 뜻이다.    

  

 인류가 원하는 세상은 ‘이만하면 됐어’가 아니라 ‘더 나은 방안은 없을까?’를 끝없이 고민하는 세상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핸드폰도 일 년이 멀다 하고 이전의 단점을 보안한 최신 기종이 나오고 기술발전을 꾀하는 마당에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건 당연한 본능이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이가 어떻게 타인의 불행을 가늠하고 행복을 강요할 수 있을까?     


 김지영의 힘듬은 먹고살기 힘든 경제적인 힘듬이 아니라서. 천애고아인 설움이 아니라서. 돈 벌어다 주는 남편도 있고 건강하고 귀여운 애도 있는 상황에서의 갈등이라서 나에게 더 와 닿았다. 밥은 먹고 살아가지만 그 밥을 하느라 종종거리는 모습에, 집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지만 그 집을 치우는 끝없는 노동에 대해, 자식이 더없이 사랑스럽지만 아이를 돌보느라 쏟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탈진 상태에 대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감사하지만 행여 맘충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커피 한 잔의 여유보다는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상황에 대해,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아이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안타까움에 대해, 먹고 살 걱정은 없지만 35만 원짜리 심리테스트비에 돌아서고 마는 빠듯함에 대해.


 나는 공감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작게 본다거나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종종 벅찰 정도의 감동을 느끼고는 한다. 세상에는 당장 먹고 살 밥이 없어 굶는 이도 있고, 경제난에 자살하는 이도 있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애타는 이들도 있다. 그 모든 고민에 해당하지 않는 환경은 ‘행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제는 ‘가진 것에 불평하자’가 아니다. 내가 가진 것들과 나 자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이야기다. 이전의 세대가 ‘내가 가진 것(가정)’을 곧 나 자신으로 해서 살아왔다면 새로운 세대는 이 두 가지의 더 나은 공존을 꿈꾸고 있다.    


 90년대와 2000년대에 히트를 쳤던 소설이 <아버지>와 <엄마를 부탁해>처럼 부성애와 모성애의 헌신을 다룬 이야기였다면, 202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는 ‘나’란 존재와 나에게 부여된 역할, 사회의 편견 사이의 간극이다. 여성의 관점에서 먼저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일 뿐 이제 남자들의 목소리도 나올 때가 되었다고 본다.    


 여자들이 자라면서 ‘조신해라’는 말을 들었듯 남자들은 ‘씩씩해라’는 소리를 강요처럼 들었고, “울면 안 된다”는 감정 억제 훈련도 비인간적일 정도로 혹독하게 받으며 자라왔다. 성인이 되자마자 꽃다운 시절을 군대에 바쳤으며 아버지가 되어서는 생계부양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회사원들의 업무환경과 고뇌에 크게 공감했다. 견디기 힘든 것들을 견디면서, 그 대가로 받은 돈의 대부분을 가족을 위해 쓰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 무게와 부피가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워서. 가슴이 아파서 많이 울었다. 회사원이 주인공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장들과 워킹맘의 이야기이기도 했기에 그들의 현실을 담은 드라마에 많은 이들이 공감과 지지를 보냈지, ‘남자들만 힘드냐? 회사원만 힘드냐? 주부도 힘들다!’라고 반박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고충을 말한다고 해서 남자들의 고충을 모른 척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이전의 어떤 영화보다도 비폭력적인 영화다. 가정을 버리겠다는 것도, 혁명을 하겠다는 것도, 남자들과 싸우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먹다툼도 없고, 남자를 칼로 난자하는 장면도 없고, 살인사건도 없고, 연쇄살인마도 없고, 복수도 없다. 극적인 장면이라고 해봤자 시댁에서 혼자 설거지를 하던 김지영이 시부모님에게 “사둔, 저도 우리 딸 보고 싶어요.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뿐이다. 자기 목소리 하나 내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걸 정신이상자의 모습이 되어서야 드러낸다.    



 그러나 김지영은 변화한다. 카페에서 실수로 커피를 쏟았다고 맘충 소리를 듣자 상대에게 가서 조용히 말한다. “저에 대해서 아시냐”라고 묻는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시기에 함부로 평가하는지 따진다. 김지영이 드디어 맨 정신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장면은 어느 여배우의 완벽한 액션 신보다 통쾌하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태권도를 배워도 마음먹고 덮치는 남자를 때려눕힐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맞아주는 역할의 상대배우가 없는 현실에서는 오히려 내가 당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김지영의 대응이 더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영화를 보면 과장된 구석이 없으며 현실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현실을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그걸 나무란다면, 아마도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이 있음을 시인하는 고백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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