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 넌 알고 있었어? 2

캔모어 -The Grizzly Paw Pub

by 자두와두

“다 왔어. 일어나자.”

“아, 벌써 다 왔어?”


태영과 형일의 고개가 툭 부러지기 전, 준호가 두 사람을 건드려 깨운다. 짧은 시간, 깊게도 잠이 들었었는지 두 사람은 캔모어에 도착한 버스 밖의 풍경을 보고는 부랴부랴 내릴 준비를 한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니 준호도 잠에 들었었는지 잠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어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우리 체력 이것밖에 안 되나.”

“그러게. 30대 체력 미리 경험하는 건가.”

“운동 열심히 하자 진짜. 지금 숙소 가서 한잠 자는 거 안 되겠지?”

“그렇지. 짐 맡겨주는 걸로 감사해야지 뭘 낮잠을 자.”

“트래킹 컨셉에 우리 체력을 고려해야 했다. 어후 힘들어”

“왜 힘들지? 미치겠네, 하.”


하나같이 곡소리를 내며 숙소로 향했다. 무겁기만 한 발걸음에, 겨우 이틀 연속으로 3시간가량 트래킹에 완전히 지쳐버린 스스로에게 아주 실망한 채 숙소에 도착해 짐을 챙겼다. 11시에 체크아웃을 해야 했지만, 집주인의 배려로 짐은 1시가 넘은 지금 챙겨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캐리어와 배낭을 챙기고, 태영은 아침에 미처 버리지 못한 쓰레기를 정리했다. 야외에 있는 쓰레기통에 2박 3일간의 쓰레기를 버린 태영은, 그제야 짐을 챙겨 나오는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너희 이거 알았어?"

"뭘?"


태영이 방금 정리한 쓰레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는 깨끗하게 비워진, 제법 두께도 있고 비싸 보이는 빈 위스키병 3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걸 이틀 새 마셨으니, 이건 문제가 있어도 크게 있는 일이지 않을까?”

“우리가 이걸 다 마셨다고? 아닐걸?”

“그럼 뭐 조상님이 오셔서 드셨겠냐. 우리가 마셨겠지.”

“이걸 마시고 3시간 동안 트래킹을 했다는 거지 그러니까?”

“왕복 3시간짜리 버스도 탔지. 어쩐지 뭘 먹고 싶지가 않더라.”

“이렇게 보면 우리 체력 좋은데? 아직 20대 맞네.”

“그것보다 위스키가 깔끔하고 좋네. 이걸 이렇게 때려 마신 건 처음인데 숙취도 별로 없고 괜찮다.”

“그럼, 공원 가서 마실 맥주부터 사러 갈까?”

“미친놈이야 저거 진짜.”


아직도 술타령 하는 형일을 보며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태영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숙소를 나갔다.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한 거 누구였냐?”

“한둘이겠냐.”


여유로운 평일 낮시간,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캔모어의 중심 거리에 온 세 사람은 길에서 마주친 한 식당에서 오늘의 첫 끼니를 먹기로 했다. 식당 입구에 있는 메뉴판에 햄버거와 튀김 요리 사진을 본 세 사람은 위스키가 헤집은 속을 기름진 햄버거로 달래 보자며 이 식당에 들어왔다. 미국 영화의 주인공처럼 치즈 버거로 해장하러 들어온 이곳이 사실은 펍이었고, 양조장이 딸린 수제 맥주 맛집이었던 건 행운이라고 할지 불행이라고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맛있긴 하네 맥주. 안 시켰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 분위기에 맥주가 없는 게 말이 안 되지.”


The Grizzly Paw Pub이라는 이름의 이 펍은 마치 산장과도 같은 외관과 맥주와 너무나도 어울리는 안주, 그리고 수제 맥주를 파는 캔모어의 한 맛집이다. 야외에도 파라솔 아래에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있었는데, 아직 추운 날씨에 아무도 밖에 앉지는 않았지만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캔모어의 정취를 눈에 담기 위해 패딩을 껴입고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해장이니 뭐니 해도 각자 커다란 맥주를 하나씩 시켜 놓고는 한껏 힘을 뺀 자세로 앉아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3일을 본 캔모어의 모습이 질리지도 않는지, 형일이 여전히 감동스럽다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여기는 봐도 봐도 너무 멋있는 것 같아 진짜. 나 여기 살까? 이런데 살면 너무 행복할 것 같지 않냐.”

“그래, 네가 애국하는 길은 한국을 떠나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뭐래. 내가 회사 다니면서 낸 세금이 얼마인데 인마.”

“너한테 낭비된 세금이 더 많지 않을까. 여기 살 거면 번 돈은 한국에 두고 가자.”

“백수는 조용히 하자 태영아.”

“너도 이제 백수잖아. 왜 직장인인 척해.”

“준호, 넌 이런 데서 일해도 되지 않아? 어떻게 생각해.”

“나라고 사람 아예 안 만나고 일하는 거 아니긴 한데, 한 달 살기 이런 건 되긴 하겠다.”

“그 집에 나도 좀 얹혀살게 해줘라. 여기 살면 사람이 진짜 건강해져서 나갈 것 같아.”

“난 발 안 씻고 자는 애랑 같이 안 사는데.”

“… 씻을게. 더럽고, 치사해 진짜.”

"누가 더럽다고?"


분위기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대화가 세 사람의 사이에서 오갔다. 음식이 나오긴 했지만 세 사람 모두 큰 관심은 보이지 않고 조금씩 집어먹기만 했다. 감자튀김을 안주로 맥주를 홀짝이던 준호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번에도 타깃은 형일이었다.


“우리 이 맥주를, 까딱하면 수십만 원을 주고 마실 뻔한 거다. 그렇지 형일?”

“그래? 벌금이 수십만 원이야? 넌 그런 건 어떻게 알았냐.”

“넌 어떻게 몰랐냐. 가만히 있어도 들리던데.”

“캐나다 대사관에 3박 4일을 있어도 안 들리겠다. 야외에서 술 못 마시게 하는 나라는 처음이라 몰랐지. 그 공원에서 맥주 한 잔 딱 하면 진짜 완벽했는데 너무 아쉽다. 진짜.”

“지금이라도 텀블러에 좀 담아서 가볼까? 맥주는 약하니까 위스키 담아서 가는 거 어때.”

“위스키 말도 꺼내지 마. 제발.”


사실 세 사람의 목적지는 식당이 아니라 캔모어 인근의 한 공원이었다. 캔모어의 상가와 마을이 모여있는 곳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잔디를 깔고 도로를 놓고는 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인 정도였지만 이곳 특유의 나무로 이루어진 숲과 그 너머의 로키산맥이 함께하니 잔디에 벤치 하나만 두어도 관광 명소로서 손색이 없었다. 형일은 그중 하나로 밀레니엄 파크에 가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를 사 가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캐나다에서는 야외에서 음주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준호 덕분에 평범한 식당으로 코스를 변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건 진짜 처음이긴 해. 왜 밖에서 술이 안 될까? 그 좋은걸.”

“사정이 있겠지. 야 준호, 우리 시간도 많은데 내일 일정 여기서 얘기하는 거 어때. 그거 얘기할 시간 따로 없지 않아 우리?”

“오~ 태영. 예리하네. 우리 내일 아침 6시에 비행기 내린다며. 도착하자마자 뭔가 하고 놀아야 할 거 아니야. 플랜이 뭐야 내일?”

“안돼. 이따가 비행기 타기 전에 보여줄 거야. 그전까진 참아.”

“너무 궁금한데. 컨셉만 말해주자 어때.”

“안돼. 이따가 봐. 한 8시간 남았다. 와, 그때까지 뭐 하지, 우리. 버스도 3시간 넘게 남았어.”

“3시간을 여기 있는 건 무리겠지?”

“무리기도 하고 민폐기도 하겠지? 그래도 일단 좀 더 있어 보자.”


그렇게 세 사람은 음식과 맥주를 시켜가며 그 식당에서 2시간을 더 보냈다. 맥주도 각자 1,500cc 가까이 마신 덕에 캘거리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의 1시간 30분은 문자 그대로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져서 실려 갔다. 아름다운 캔모어의 마을과 마지막까지 눈이 떨어지지 않던 로키산맥과는 아름다운 작별을 할 것 같았지만 실상은 버스에 실려 잠에 빠진 채 멀어져 갔다.




공항에 오고 가는 비행기는 다음 여행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하나의 여행이 끝났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세 사람의 아쉬운 감상은 공항에 와서야 뒤늦게 떠올랐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유튜브를 보던 태영이 영상을 멈추고 옆에 앉은 형일에게 말했다.


"어떻게, 속이 좀 개운해 이제?"

"아니, 속 쓰려 죽겠는데."

"그거 말고 인마. 회사에서 개고생한 거 리프레쉬하러 온 거잖아, 여기. 이제 만족하냐고."

"아 그거. 그 속이 아직도 쓰린 건가. 야, 회사 생각하니까 더 배 아픈 것 같아. 조용히 있자, 우리."


태영이 신경 써서 해준 말에 형일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대답에, 태영은 편안함을 느끼며 다시 보던 영상을 이어서 재생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