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 넌 알고 있었어? 1

밴프 - 존스턴 협곡

by 자두와두

어제와 같은 시간, 창문에는 같은 풍경을 비추는 버스에 어제도 있던 승객 세 명이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어제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창문에 비치는 풍경에 크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셋 중 한 사람은 어딘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는 점이 있었다. 잠시 조용히 풍경을 감상하던 한 사람은 불만이 있던 점이 다시 떠오른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내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근데 거기도 진짜 괜찮은데, 같은 호수인 건 맞는데 어제 갔던 데랑 또 완전히 다르다니까?”

“알겠어 형일. 사진 보니까 좋아 보이더라. 나 마음만은 이미 거기 다녀왔다.”

“진짜 오늘 가서 그냥 그러면 그 아저씨들한테 곰 스프레이 뿌린다.”

“너 그거 들어도 그 아저씨들한테 져. 팔근육 못 봤냐? 곰 그냥 때려잡겠더라 그 사람들은.”

“그래, 스프레이 필요 없어서 우리 준 거일 수도 있어. 그냥 좋은 구경 하기를 바라라.”


어제 처음 본 사람 편을 드는 준호와 태영이었지만, 틀린 말이 없다는 생각에 형일은 불편한 마음을 넣어두었다.

형일이 오늘의 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캔모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라시 호수라는 곳이었다. 어제 갔던 레이크 루이스와 같이 로키산맥에 둘러싸인 호수이고 트래킹 해서 조금 올라가면 호수를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설명하자면 두 곳은 똑같은 여행코스라고 볼 수 있지만, 모든 호수의 모습이 다르고 같은 산맥이라도 위치마다 그 기운이 다르기 때문에 두 곳에서 느낄 수 있는 건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제 저녁 식사 이후에 만났던 두 남자가 새로운 여행지를 추천해 준 탓에 오늘의 여행지는 새로운 곳으로 바뀌어 버렸다. 호수가 아닌 새로운 여행지를 강렬하게 주장하는 두 사람에게 형일은 하는 수 없이 수긍했지만, 내심 자신이 골랐던 그라시 호수보다 조금 덜 좋은 곳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존스턴 협곡이다. 레이크 루이스는 벤프의 버스정류장에서 투어 버스를 탔다면, 존스턴 협곡은 같은 곳에서 일반 버스를 타고 40분가량을 달려 도착할 수 있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는 협곡의 입구로 지어진 구조물이 승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 외에도 세 사람을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Hey, 왔구나?”

“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어제 만났던 두 사람이 먼저 세 사람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어제도 두 번이나 만난 두 사람이었지만, 나서서 대화를 하지는 않았던 형일은 오늘에야 두 사람을 제대로 봤다. 중년으로 보이지만 서양인이다 보니 정확한 나이대는 가늠이 되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보통의 체형인 것처럼 보였지만, 살짝 걷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은 근육으로 덮여있었고 그 가운데엔 선명한 핏줄이 지나갔다. 한 명은 키가 큰 편이었는데, 키가 큰 사람은 차분하고 넉넉한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장난꾸러기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준호가 능숙한 영어로 두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트래킹 코스로 향했다.


“두 분도 버스 타고 왔어요?”

“아니 우린 차로 왔어. 캘거리에서 렌트를 했거든.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준호가 가장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협곡까지 가는 길은 어제 실컷 걸었던 밴프 공원의 숲길과 똑같았기 때문에 딱히 구경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형일은 잊지 않고 빨간불이 들어온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준호의 옆에 있던 태영이 두 남자에게 물었다.


“저희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이 뭐예요?”

“오, 난 브루스(Bruce)고 여기는 해롤드(Harold)야.”

“저희는 태영. 아니 저는, 여기는 이랑 이에요.”


태영도 같이 이름을 말하다, 발음이 어려운 이름 대신 성만 소개했다. 다행히 성은 발음하기가 쉬운지 브루스와 해롤드도 어색하게나마 따라 불렀다.


“네가 , 네가 이고, 여기 샤이 가이가맞지?”

“샤이 카메라맨. 그래서 누가 의 남자 친구지?”

“와우. 전 양보할게요. 네가 남자친구 해.”


준호가 징그럽다는 듯 태영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태영도 인상을 찌푸리며 맞장구를 쳤지만,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형일은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존스턴 협곡은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유명한 트래킹 코스인 만큼 길과 이정표가 잘 되어있는데, 길만 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이 나오고, 어느새 암석으로 둘러싸인 협곡에 이르게 된다. 이 트래킹 코스의 목적지는 lower falls와 upper falls인데, 길도 완만하고 볼거리도 많아 부담 없이 올 만한 여행지였다. 특히나 협곡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산맥은 한 번씩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야, 여기가 제대로다. 형일 이쪽도 한번 찍어 봐.”

“아니 거기는 역광이잖아. 이쪽에서 찍어야지. 그리고 나 사진도 찍어줘 봐. 로키산맥까지 왔는데 바위랑 사진 한번 찍어야 하지 않겠냐.”

“우리 가위바위보 2탄 찍자. 이번엔 폭포에서 정수리 수련하기.”

“별로 없는 머리털 간수나 잘해 성준호.”


캔모어에 밴프까지 3일째, 아직도 이곳의 자연에 환호하는 세 사람이었다. 숲과 산맥, 마을까지 어우러진 이곳은 가는 곳마다 새롭고 탄성을 자아냈지만 세 사람의 감상과 반응은 한결같이 단순하고 정신없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브루스와 해롤드는 점잖게 서서 세 사람의 호들갑을 기다려주다 함께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길을 걸을 때 두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주로 준호의 몫이었다. 반면 형일은 여전히 두 사람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야, 이제 그만 샤이할 때 되지 않았냐? 왜 이렇게 오래 낯가려?”

“아니, 낯가리는 건 아닌데. 아닌가? 맞다고 해야 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게 있어. 그리고 나 영어도 잘 못해. 무슨 말 하는지를 모르겠는데 어떻게 얘기를 하냐.”

“뭐야, 뭐가 있긴 있는 거야?”

“있긴 뭐가 있어. 간식이나 있으면 좋겠다. 초코바 왜 안 사 왔냐 우리.”


태영의 추궁에 형일은 애써 말을 돌렸다. 태영과 형일의 앞에서는 준호가 브루스, 해롤드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 진짜 좋네요! 추천해 줘서 고마워요. 두 분은 여기 와보신 적이 있나요?”

“우리도 처음이야! 그런데 여기는 분명 좋을 것 같아서 추천했지. 협곡이 진짜 멋있지 않아?”

“맞아요. 저희 오늘이 밴프에서 마지막 날인데 여기로 오기를 잘한 것 같아요.”

“오, 내일은 어디로 떠나?”

“저희는 내일 토론토로 가요.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뉴욕까지 가는 게 계획이에요.”

“멋진 계획이다. 우리도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봤어. 진짜 멋지지 않았어? Honey?”

“맞아. 가면 배를 타고 폭포 바로 앞까지 내려갈 수가 있어. 너희도 꼭 타봐.”

“폭포 앞까지 갈 수가 있어요? 무조건 타야겠네요.”


열심히 배운 영어를 쓸 일이 딱히 없던 준호는 이 기회에 영어를 원 없이 내뱉고 있었다. 대화가 할수록 뭔가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티는 내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 보면 할 말이 떨어지곤 했지만, 그리 길지 않은 트래킹 코스는 그때마다 준호를 구해주곤 했다.


“오 저기가 Upper Falls인가 봐.”

“어퍼긴 한데, 좀 약한데? 그냥 랜드마크 느낌으로 이름만 붙인 건가?”

“약간 와드 같은 건가 봐. 존스턴 협곡 211번 지점 이런 느낌.”

“왜 211이야?”

“아 좀 넘어가 공바리야.”

“211은 여기선 경찰 아니냐. 뭐 경찰에 신고…”

“아 넘어가라고.”


준호의 한마디에 태영과 형일이 열 마디를 덧붙였다. 2시간 정도 걸어온 협곡의 모습에 두 사람도 이제는 크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브루스와 해롤드가 준호에게 먼저 말했다.


“여기가 마지막 코스인데 우리 같이 사진이나 찍을까?”

“오 좋아요! 저기 저분에게 부탁할까요?”

“좋아. 내 거로 찍고 보내줄게 그럼.”


해롤드가 지나가던 사람에게 핸드폰을 맡기며 5명이 함께 있는 사진을 부탁했다. 브루스와 해롤드도 여행에서 만난 세 사람이 반가웠는지 기념사진에 적극적이었다. 사진은 태영이 대표로 전달받았다. 랜드마크치고는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은 폭포를 배경으로 브루스가 해롤드의 허리에 손을 감싼 채 다정하게 웃고 있고, 그 앞에는 태영, 준호, 형일이 나란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을 감상하는 태영을 보고 해롤드가 말했다.


“잘 나왔다 그렇지?”

“그러게요. 날씨도 좋고 좋은데요?”

“밴프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이야. 이제 30분이면 끝인데 너희는 다음 일정이 뭐야?”

“캔모어요. 마을을 즐길 거예요.”

“캔모어도 좋은 곳이지. 우리도 이번 주에 한번 갈 계획이야.”


형일이 계획한 일정이 있는지, 짧은 영어로 대답했다. 준호와 태영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일정에, 이제야 오전이 끝나갔지만, 존스턴 협곡의 트래킹은 해롤드의 말처럼 30분이 채 안 걸려서 끝나 다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시간도 잘 맞았는지 10분 뒤에 도착 예정이었다.


“두 분은 어디로 가세요?”

“우린 모레인 호수에 갈 계획이야. 너희와는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그러네요. 같이 놀아서 재밌었어요. 재밌는 곳 추천해 줘서 고마워요.”

“우리도 재밌었어. 곰 스프레이는 다른 곳에 잘 쓰도록 해!”

“아 스프레이. 네, 고마워요. 잘 가요!”


버스 정류장에 남은 세 사람을 뒤로하고 브루스와 해롤드가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형일이 조용히 말했다.


“야, 맞지?”

“그런 것 같지?”

“그렇더라. 아까 사진 보니까 허리에 손도 올리고 있던데. 깜짝 놀랐다 진짜.”

“어쩐지 Honey라고 부르더라고. 나 실제로 보는 거 처음이야. 신기해.”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태영이 형일을 보고 말했다.


“근데 너 이것 때문에 조용히 있었어? 어째 저분들이랑 한 마디도 안하더만.”

“어. 눈 마주치면 자꾸 생각나서. 티 내면 왜인지 실례일 것 같은데, 말하면 무조건 티 날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지.”

“뭐야, 넌 알고 있었어? 형일?”

“어. 어제 산에서 우리 만나기 전에 둘이 뽀뽀하는 거 얼핏 봤어.”

“와 그건 진짜 확실했네.”


한국말로 하면 분명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그럼에도 브루스와 해롤드 앞에서는 하지 못한 속에 있던 말을 꺼낸 형일은 이제야 속이 시원해진 듯했다. 두 사람이 차를 주차한 곳은 버스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아, 둘이 차에 탑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에 타기 전, 브루스가 해롤드의 볼에 뽀뽀하는 모습까지 아주 또렷하게 보이는 거리였다.


“이렇게까지 확실하진 않아도 되는데.”

“그러게. 사이가 좋으시네 두 분.”

“행복하세요.”


한국에서는 쉽게 보지 못할 장면에, 세 사람은 버스가 올 때까지 유독 조용한 10분을 보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