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항상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한다. 직장 내 직위, 사회적인 위치, 부와 명성 등 오를 나무는 다양하고, 대부분의 인간은 이 모든 나무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가지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살아간다. 그리고 오늘, 이 중 하나의 나무에 만족스러울 만큼 높은 곳까지 오른 지혜는 자신이 오른 나무를 감상하는 중이다.
“어 엄마. 정리 다 했지. 짐도 별로 없는데. 지금 그냥 야경 구경해. 내가 이것 때문에 계약했잖아. 여기 낮에 보러 왔을 때도 엄청 좋았는데, 밤 되니까 야경이 더 좋은 것 같아. 엄마도 다음 주에 구경하러 와.”
지혜는 두 사람이 체조를 해도 충분할 만큼 넓고 텅 빈 공간에 놓인 1인용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좋아하는 지혜는 아예 집에서 매일매일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앞이 탁 트인 고층 오피스텔을 구해버렸다. 그렇게 처음으로 올라본 정말 높은 나무에서, 지혜는 그토록 좋아하던 경치를 원 없이 즐기고 있었다.
와, 나 이제 이런 뷰를 매일 볼 수 있는 건가. 진짜 성공했다 이지혜.
커다란 통창에 비친 건물 앞의 경치는 지혜가 만족스러울 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웠다. 오피스텔 바로 앞에는 신경 써서 조성한 자그마한 공원이 있다. 30분 정도면 다 둘러볼 만큼 작은 공원이지만 촘촘하게 심어 빠짐없이 푸른 잔디와 나무로 된 산책로, 그리고 산책로를 둘러싼 조명은 간단하면서도 안정적이다. 공원 너머의 하천을 둘러싼 숲에서는 아무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지만, 그보다 더 먼 곳에는 고층 빌딩이 저마다 번쩍이고, 도로에는 불빛밖에 안 보일 정도로 작은 차가 길게 줄지어 장난감처럼 지나다닌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냈을 이 아름다움에 지혜는 점점 생각에 잠긴다.
저 아파트 한칸 한칸이 다 사람이 사는 집이겠지?
저 사람들은 다 무슨 일을 하면서 저 집에 사는 걸까?
주변에 회사도 많고 시설도 많긴 한데, 그래도 저렇게 많은 사람이 다 수용이 되려나?
지하철이 저기 있으니까 다른 데로 갈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럼 저기 살 필요가 없지 않나?
남들이 보기에 쓸데없는 생각이 조금 들떠있던 기분을 살짝 가라앉히며 마음을 정돈하고 평화로운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멍때린다고도 볼 수 있는 이 시간을 지혜는 나름의 명상이라 생각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마다 각자 사연이 있고 인생이 있는 거겠지?
나 한 사람만 하더라도 너무 많은 사연이 있고 기억도 안 날 만큼 많은 인연이 있는데, 저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모으면 어떤 느낌일까.
어떻게 보면 이 빌딩 하나만 해도 수백 명이 있으니까 어마어마한 사연이 모여있겠네.
저 아파트에는 보통 한 가정이 살 테니까, 한 집에 두 명인 거잖아.
두 사람이 저렇게 같이 살 때까지의 이야기도 정말 큰 사연일 텐데, 그런 집이 저렇게나 빼곡하게 많은 거구나.
15평, 25평, 34평, 사람이 사는 공간의 크기는 0.01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지만, 그곳에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 단위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손가락 두 개로도 가려지는 네모반듯한 건물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뒤덮여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건물에 빛나는 창문 하나에 한 사람, 한 가정의 이야기가 더해지며 지혜가 보고 있는 창문의 까만 하늘을 뒤덮었다. 너무 거대해지는 환상에 덜컥 겁이 난 지혜는 명상 시간을 마치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지혜는 이사 온 동네 구경도 할 겸 집 주변의 번화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괜찮은 카페가 있어 오늘의 작업공간으로 선택했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과 함께 책도 보고 웹서핑도 즐기는 지혜는 이런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늘 노트북을 지참하고 있었다. 지혜가 들어온 카페에는 1층에 자리가 꽉 차 있고, 한쪽 벽면에는 2층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지혜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1층에 비해 비교적 한산한 2층에 자리를 잡았다. 1층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카페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까지 너무도 잘 보이는 위치였다.
“요즘 그 AI가 이런 것도 해준다던데…”
“아니 미친, 걔가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이 조항을 보시면, 고객님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는 부분이 없게 하려고…”
1층에선 테이블마다 다른, 아주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화를 통해 이어지면서 각자의 생각이, 사연이 서로 어우러진다. 그렇게 섞인 이야기가 모이고 커져, 그렇게 한 공간이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메워진다.
AI가 그런 것도 해주면 사람은 이제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걔가 뭐라고 했는지 빨리 말해 봐봐. 궁금해 죽겠네.
고객님한테 피해가 너무 갈 것 같은데…
지혜는 스치듯 들리는 대화에 자신의 생각을 슬쩍 얹어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지혜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그러다 문득, 지혜는 2층에 홀로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1층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비해 자신은 아주 작게 느껴졌다.
저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려나. 웬만한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도 안 하겠지?
어제 내가 보던 아파트에서 보면, 내 집도 그냥 건물에 켜진 불 중의 하나인 거잖아.
나도 그 사람들 못지않게 많은 사연이 있는데, 내 사연을 알아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젯밤에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커지던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의 이야기에 겁이 나던 찰나,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진동벨이 울린다. 1층에 내려가 커피를 가져와 다시 자리에 앉는 사이, 지혜에게만 보이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금세 사라지고 그저 사람만이 남아있다.
얼마나 되긴 뭘 얼마나 돼. 내가 알아주면 되지. 할일이나 해야지. 아까 헬스장 이름이 뭐였더라.
의외로 쉽게 생각들을 떨쳐낸 지혜는, 가방에서 컴퓨터를 꺼내어 오늘의 일상을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