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음에 대하여
고온다습한 한국 여름은 정말이지 딱 질색이다. 열이 많은 소양인 체질 덕에 쩌덕-쩌덕- 땀에 달라붙는 셔츠, 개새끼 마냥 헥헥 대는 내 몰골까지, 어느 하나 아름답지 못하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땀이 고여 있는 사람들의 미간에는 저마다 내천 하나씩은 달고 있다. 거기에 다섯 보 뒤에서 걷고 있는 나한테까지 친-히 담배 연기를 뽐내는 놈들은 왜 이리 많이 보이는지, 기어코 내 속까지 끓게 만든다. (녀석들의 꽁초는 결코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법이 없다.) 나는 (한국) 여름이 가장 좋다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기회가 될 때 꼭 이곳을 뜨고 말 테다. 모기가 없는 건조한 여름을 지닌 곳으로.
같은 여름을 두고도 ‘바캉스의 계절’이라며 찬양하는 이들을 보면, 싫음이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지 상기하게 한다. 구역질 나는 음식 쓰레기도, 똥 한 푸더기도, 파리에게는 그저 일용할 양식이 아니던가. 따라서 내가 싫어하는 것을 굳이 네게 강요할 마음은 없다. 다만 함께 까는 뒷담만큼 우리의 동지애를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게 있기나 할는지 아쉬운 고민이 생길 뿐이다. 다행히도 나는 너와 나의 다름이 싫지 않다. 너는 결코 내가 여름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지 못하겠지만, 너의 호는 내 단단한 불호를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으리라.
동시에 나는 우리가 서로의 불호를 지금보다는 더 많이 나누길 원한다. 내 불평이나 네 불만을 곧이곧대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우리가 서로 싫어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더 면밀히 알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너와 나 사이 적당한 곳에 선을 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너와 멀어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서로의 불호가 되지 않기 위함이다. 네가 뭘 싫어하든 괘념치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아마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선을 발견하지 못하고 서로를 수차례 침범하고 말 테다. 서로의 선이 닿을 때마다 한 개 이상의 교점이 생기기 마련이고, 거기서 우리는 분명 교전과 양보를 거쳐 각자의 경계를 새로 그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서로 다른 불호가 결코 불화의 신호가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선 긋기의 최종 목적은 서로의 영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싫음의 적신호는 언제나 그어 놓은 선을 침범할 때 켜지기 마련이고, 이것이 우리가 서로의 불호를 나눠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각자의 가시의 길이를 확인하고서야 우리는 가장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너와 나의 다름이 싫지 않으며, 내 선은 칼날이 아닌 지우개 달린 연필로 그어졌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싫어하는 이유로 ‘그냥’이라고 답할 때가 많지만, 기저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을 때가 많다.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은 경험 전부터 본디 불안한 법이다. 이는 아마도 머나먼 조상들이 각종 죽음의 공포를 피하려 DNA에 새겨 놓은 또 다른 선의 유산일 거다. 여기서 싫음은 우리 깊숙이 박힌 연약함을 대변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피어난다. 따라서 불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달된 인지 감각이며, 이 ‘싫음’의 선은 태생적으로 화살촉이 부재한다. 여름 모기가 싫다 하여 마음대로 멸종시킬 수 없으며, 뜨거운 여름을 없는 셈 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만 괜찮다면 나는 종교든 정치든 어떤 터부도 이야기할 준비가 돼 있다. 물론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니 나는 결코 널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서로 백분 이해하는 관계가 어디 존재하긴 하던가. 존재하는 건 자신을 지키려 처절히 불호하는 우리 약자들뿐이다. 싫지만 어쩌겠는가, 이리 생겨 먹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