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과 천사

지금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과 답

by 식이

고단한 밤이다. 눈앞에 이 50쪽짜리 연구개발계획서에 5억 자금과 사업의 존망이 달려 있다. 다윗도 뭣도 아닌 나 같은 햇병아리에게 이런 압도감을 안겨주다니. 오전 7시 반, 제값 못 한 사무실 밤샘을 끝으로 누더기 같은 행색을 털어내고자 맞은편 헬스장으로 향했다.


이례적인 폭설로 기록된 올해 첫눈은 내 회색빛 일상을 아주 잠시나마 하얗게 덮어주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온 걸 후회했지만, 지친 몸은 발길을 돌릴 마음이 없다. 말쑥한 차림으로 출근하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의 몰골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스물여섯쯤이던가, 밤새 클럽에서 놀다 맞이한 아침 전철길의 내 모습이 떠올라 쓴웃음이 나왔다.


힘찬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샤워실로 재촉하는 내 발걸음에서 ‘철컹’ 하는 죄인의 족쇄 소리가 났다. 물줄기에 몸은 한결 가벼웠을지언정, (정신) 노역으로 흘린 땀에 찌든 자괴감은 함께 씻겨 나가지 못했다. 다가오는 하루가 버겁다.


‘다들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 거야, 대체.’ 지상 세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그때, 숏컷의 중년 여인이 청소 카트를 끌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버튼을 누르고 먼저 타라는 내 손짓에 그녀는 짧은 감사와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 에구, 운동하고 들어가는 길이에요?


겨우 8초 함께 있을까 한 사람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죄인은 어색한 너털웃음을 얹어 고백했다.


- 아니요, 씻기만 했어요…. 하핳…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이는 건 넉살이 좋아서가 아니라, ADHD 환자 특유의 과잉공유 (Oversharing) 증상 탓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씻으러라도 온 내 작은 노고를 치하하며 말했다.


- 그래도, 이른 시간에 이렇게…


내 작은 친절에 보답이라도 주듯,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


- 머니머니 해도 건강이 최고더라고요.


기분 좋은 스몰토크. 건너편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그녀가 어쩌면 내가 놓치고 있던 어떤 중요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내려온 천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청소부의 모습을 한 그녀 말고도 천사가 아닐까 하는 내 의심을 받는 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난 지 9개월 된 조카, 도윤 군. 1,700g의 주름진 핏덩이로 태어나 날 때부터 여러 호스를 달아야 했던 녀석은 장하게도 잘 버텨주었고, 이제 제법 살도 올랐다.


도윤을 처음 안았을 때 나는 사람이 이렇게 귀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도파민에 찌들지 않은 순백함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는 녀석이 몹시 부러웠다. 고백건대, 작은 질투심마저 들었다. 너는 작은 몸짓만으로도 칭찬을 받는구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이 조금은 애처롭게 느껴졌다. 입도 떼지 못한 주제에 녀석은 내게 묻는다. ‘삼촌, 너는 제대로 살고 있니.’



한 해 한 해 겨우 아등바등 살아남아 내 싱싱함을 바친 대가로 나는 어제보다 아-주 약간은 더 떳떳한 삼촌이 되었을까. 질문과 대답, 그 무엇 하나도 명쾌하게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은 먼 훗날을 기약해야 하려나 보다. 지혜 없이 몸만 커버린 채로 어른 행세를 해대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될까 두렵다. 해를 거듭할수록 내 나이테에는 때 묻은 양심과 용기 잃은 타협의 역사가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조카의 ‘새’ 눈은 거울처럼 맑아서 얼룩진 내 모습을 여과 없이 비춘다. 촉촉한 저 눈망울은 성수로라도 차 있는 걸까. 세상 무해한 것에 무장 해제되어 지난 삶을 반추하며 고해성사한다.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는 삶에 나는 여전히 어떤 질문도, 해답도 찾지 못했다. 도윤아, 솔직히 삼촌은 지금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