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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굴

대화의 밀도_케렌시아_휴식의루틴_자기만의공간_


변호사시험을 준비할 때, 월화수목금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달리고 나면 토요일에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안았다. 그래서 스터디 모임을 주로 토요일 오후에 배치를 해두고, 스터디를 준비하기 위해 토요일 오전 시간을 쓸 수 밖에 없게 만든 다음, 토요일 오후에는 마지막 남은 집중력을 짜내서 나를 공부로 밀어 넣게 만드는 전략을 취했었다.


그렇게 토요일 오후 5~6시 정도에 스터디가 끝나면 나는 완전한 번아웃 상태가 되고, 책을 쳐다보기도 싫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고, 심지어 어떤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주로 그 때 나는 학교 후문 앞 슈퍼마켓에 들러, 막걸리 한두병과 두부 한 모, 볶음 김치 하나에 달달한 조청 유과 한 봉지를 사서 검은 봉지에 담아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앞에 노트북으로 그 당시 좋아했던 1박2일이나 한국영화를 켜두고(자막 읽는 것도 귀찮아서), 침대에 반쯤 눕고 반쯤은 앉아 두부김치를 먹으며 차가운 막걸리를 마시는게, 그 치열했던 일주일의 열기를 식히고 다음 한 주를 준비하는 내 루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 시간 나만의 굴로 들어간 것이었다. 투우 경기에서 마지막 일전을 앞둔 소가 잠시 숨을 고르며 쉴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공간을 케렌시아(Querencia)라고 해서 이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사실 그 당시 내 상황에서는 케렌시아라는 말 조차 거창하게 들리는 환경이었다.


그냥 내 굴이 필요 했었던 것이다. 아무도 말 시키지 않고 아무도 내 에너지를 빼았지 안고 편하게 널부러져 있어도 아무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만의 장소가 필요 했었다.


신기하게도 이 단순한 루틴을 지키지 않은 주에는 꼭 탈이 났다. 주말에 이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놀러를 간다든지, 아니면 압박감에 못 이겨 토요일도 늦게까지 열람실에서 공부를 한다든지,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김없이 그 다음주에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 이상의 시간을 컨디션 회복에 쏟아붓게 되었다.


수십주의 이 행동패턴을 반복해서 경험하고 나서, 나는 일상에서 휴식의 총량은 절대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총량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만의 루틴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를 위해 아무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이기에 사실 ‘나만의 굴’ 같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리는 없어져 버린지 오래다. 그래도 지친 하루를 보내고 나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두고 잠시 라디오를 끄지 않고 조용히 차안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을 하는 그 짧은 시간을 틈틈이 즐기는데, 좁은 내 굴에서 10분~15분 남짓의 시간에도 나의 에너지가 채워진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누구에게나 자기 공간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휴식의 루틴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필요한 휴식의 총량은 지켜져야만 한다.


#나만의굴 #케렌시아 #휴식의루틴 #나만의공간

#휴식총량불변의법칙 #좋은주말 #양질의휴식시간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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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달 제주도에서 묵은 소소한하루(내돈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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