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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인생작 '랭보의 시학'

아버님의 첫 책과 아들의 첫 책, 그리고 첫 책의 첫 문장의 기억


평생을 학자로 살아오신 장인어른은 퇴임하시던 해에 한 권의 책을 발간하셨다. 1984년 프랑스에서 ‘랭보와 진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27년간 불문과 교수로 한 길을 걸어오며 쌓아온 연구결과물을 700페이지에 달하는 역작인 ‘랭보의 시학’으로 남기신 것이다.


KakaoTalk_20201122_091822977.jpg 아버님의 인생작 '랭보의 시학'


운석과 같이 세상에 나타나 짧고도 번득이는 생을 살다 간 프랑스의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남긴 시 전집을 해석하고 비평한 국내 유일의 서적인 이 역작의 서두에는 아래와 같은 한 문장이 적혀 있다.


‘사랑하는 아내 영화에게’


이 진한 한 문장에는 1979년 첫 째를 임신한 아내를 두고 혼자 프랑스로 건너가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된 아버님의 짙은 미안함과, 이후 말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땅으로 건너와 두 딸을 타지에서 낳고 키우며 묵묵히 내조를 하신 아내에 대한 깊은 고마움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KakaoTalk_20201122_090927682_01.jpg 랭보의 시학 책에 글귀를 적고 계시는 아버님

이 책을 받아 들고 처음 펼칠 때 눈에 들어온 이 한문장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아버님께 언젠가 내가 첫 책을 쓰게 되면 나도 사랑하는 사람(아버님의 둘째 딸)의 이름을 첫 장에 적어도 되냐고 여쭤보았다. 아버님은 싫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몇 해 전 발간한 나의 첫 책은


아내 한이에게,

이 책을 바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KakaoTalk_20201122_091649870.jpg 나의 첫 책 '협상바이블'의 첫 페이지, 첫 문장

지금 보아도 내 첫 책의 첫 문장으로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장인어른이 살아오신 삶을 존경하고, 늘 장인 어른의 삶에서 많은 힌트를 얻는데, 첫 책의 첫 문장까지 장인어른의 아이디어를 차용한데 대해 이 글을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마음의 빚은 오늘 저녁 양평집에서 맛있는 목살을 구워 지평막걸리와 함께 대접해드릴 생각이다.


#랭보의시학 #한남자의삶 #첫문장 #아들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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