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밀도, 아빠의유산 중
선율이, 선웅이, 이도.
내 인생에 우주인 세 아이들에게,
아빠로서 나는 어떤 유산을 남길 수 있을까?
"그 어디를 둘러봐도 책이 있었다. 우리 집만 하더라도 책장뿐 아니라 테이블과 의자 위에도 책이 쌓여 있었고 할머니의 집에 가면 서재 사방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거실의 한쪽 면, 할아버지가 쓰시는 서재의 삼면, 흔히 ‘복도’라고 불리는 통로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놀이방의 한쪽 벽 4분의 3이 책이었다. 크리스마스나 생일이 돌아오면 선물의 80퍼센트가 책이었고, 이런 책은 읽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되살리기의 예술』 중에서
『되살리기의 예술』의 저자인 다이애나 애실은 1945년부터 무려 50여 년간 영국의 전설적인 편집자로 일하고 2019년 10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평생을 읽고 쓰고 편집하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며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의 천직인 책 편집과 밀접히 연관된 책 읽는 습관은 사실 어릴 때부터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녀는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부모와 조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리고 그녀도 자연스럽게 책을 접하고 마음껏 책을 읽었을 것이다.
얼마 전, 선율이가 주말에 외출을 하는데, “아빠는 왜 어디 나갈 때마다 항상 그렇게 책을 챙겨가?” 하고 물었다.
실제로 책을 들고 가도 못 읽는 경우도 많지만 그럼에도 나는 항상 책을 챙겨 나간다. 책을 가방에 넣는 행위만으로도 일종의 포만감이 생기고, 한 문장이라도 책을 읽는다면 그 하루는 그렇지 않은 하루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도 부디 즐겁게 책 읽는 습관을 가지길 바란다. 그리고 책 읽는 엄마 아빠의 일상을 보며 자연스럽게 영감을 얻길 바란다.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빠가 주제에 상관없이 소탈하고 격없이 대화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서로 대화가 잘 맞아 깔깔거리며 이야기하느라 아이들이 끼어들 틈조차 없는 모습, 함께 본 영화를 놓고 서로 다른 결말을 상상하며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모습, 힘든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먹으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나지막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도 아이들의 기억에 잔잔하게 스미길 바란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며 싸울 때에도 엄마 아빠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아이들이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 사람의 인생을 배우고, 다른 생각을 마주했을 때 귀를 닫기보다는 호기심으로 먼저 다가가길 바란다. 상대와 다정하게 교감하는 법을 터득하고 대화의 힘을 긍정하고 대화의 묘미를 깨닫길 소망한다.
삶이 어디 매순간 기쁨으로만 가득 찰 수 있으랴. 아이들이 독립하기까지 적어도 20여 년을 함께할 그 시간 동안, 꼭 쥐고 있는 끈을 놓고 철퍼덕 하고 바닥에 주저 앉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 극한 상황 속에서도 엄마와 아빠가 허우적대며 누군가 탓할 대상을 찾거나 서로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싱겁게 웃으며, “허허, 슈퍼 마리오가 좀 도와주면 좋겠네”, “우리 삼둥이들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하고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을 기억했으면 한다.
"어느 따뜻한 봄날 우리는 오스트리아 티롤레세 지방에 있는 페른패스의 한적한 언덕에서 반바지를 입고 스키를 타고 있었는데 내가 옷을 몽땅 벗고 알몸으로 타자고 제안해서 우리는 커다란 스키화와 스키만을 신은 채 경사면을 따라 달렸다. 구경꾼이 있었다면 희한한 광경을 보았겠지만 아무도 주위에 없었다.
로저 곶에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는 우리는 수영복을 입지 않고 헤엄을 쳤다. 스코트는 수영을 잘 했고 우리는 곧잘 메인 주의 우리 집 앞에 있는 스프리트 코브의 차가운 바다에서 수영을 즐겼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중에서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나오는 장면이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가 눈밭에서 눈 만난 강아지처럼 좋아하는 모습, 그리고 차가운 바다에서 서로 깔깔거리며 수영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이들은 삶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시대를 앞서 살아간 사상가들이지만, 자연 앞에서는 개구지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즐겼다.
결국 우리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갈 존재들이다. 우리는 대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이들이 도시의 편리함보다는 자연에 감사하길, 대자연의 품에 안겨 아무 거리낌없이 뛰놀고 장난치며 살아가길 바란다. 설사 도시에서 살아가더라도 늘 자연에 마음이 열려 있길 바란다.
물질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척 크다. 살아 보니 돈을 적게 버는 사람은 돈이 모자라서 고민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더 버느라 고민하더라. 아이들이 엄마와 아빠의 삶을 보며 돈이 삶에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길, 돈을 좇지 않고도 삶의 정수를 맛보며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길 바란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물질과 돈이 부정적이기만 하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일정 수준의 경제적 자유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 돈이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돈을 더 얻기 위한 집착을 조금만 포기하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과 좋아하는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아이들이 알기를 바랄 뿐이다.
2003년 처음 장인어른을 뵈었다. 그때는 여자 친구 한이의 아버지가 언젠가 장인어른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기억 속 한이 아버지는 늘 거실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와인을 한잔하고 거나하게 취기가 올랐을 때에도, 한이 아버지는 다시 자기의 책상으로 돌아가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타닥거리며 무엇인가에 골몰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분이 무엇에 그리 몰두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후, 장인어른이 정년 퇴직을 하시던 해에 『랭보의 시학』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불문과 교수님이신 장인어른의 박사 논문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젊은 미치광이 천재 시인 랭보가 평생 써 나간 시들은, 장인어른이 30년간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그해에 700쪽의 장서로 정리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 책은 장인어른 삶의 역작이자, 장인어른이 쌓아온 지식의 총체였다.
내 아이들의 기억 속에도 엄마와 아빠가 자신의 일에 무섭게 집중했다는 사실이 각인되길 바란다. 그리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몰입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 흔들림없이 쌓아 나가며 끈기 있게 골몰해야 부끄럽지 않은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을 세 아이들이 깨닫길 바란다.
선율이, 선웅이, 이도. 세 아이들이 스스로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렇게 조금씩 싹튼 마음속 사랑의 씨앗이, 아이들의 심장을 가득 채우고, 그 사랑이 넘쳐 아이들이 만나게 될 인연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도 널리 뿌려지길 바란다.
그리고 선율이, 선웅이, 이도 각자가 자기의 세계를 가진 우주라는 점, 이 우주 안과 밖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사물은 우리만큼 소중하다는 점, 남에게 주눅들지 않고 남을 무시하지도 않으면서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기 바란다.
세 아이들에게 남기는 아빠의 유산을 적고 보니, 정작 물려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부모가 원하는 바람만 적은 듯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렇게 남기는 아빠의 정신적 유산은, 결국 아빠와 엄마가 이 같은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라야 완성되는 것이리라.
글: 대화의밀도(류재언, 라이프레코드), 아빠의유산 중
사진: 권순섭작가님
장소: 성수동인생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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