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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재은 Nov 03. 2021

아이를 기르며 포기를 배운다 - [0]

[0] 프롤로그 : 실패의 경험 없이 살아 온 서른 살이 엄마가 되는 법

[0] 프롤로그 : 실패의 경험 없이 살아 온 서른 살이 엄마가 되는 법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 엄마는 내가 언젠가는 넘어지고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항상 나에게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잘 했다. 예를 들면, '두 마리 토끼는 한 번에 잡을 수 없다' 라거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등의 구절을 인용해가며 나더러 자만심을 경계하라는 이야기를 입이 닳도록 해 왔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더더욱 약이 올라서 일을 두 배, 세 배로 벌리곤 했고, 예를 들면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기간에 동시에 텝스 시험도 신청하고 한국사 시험도 준비하며 모의 국회 참가 공지를 알아보는 등, 꼭 모래시계를 가진 헤르미온느처럼 살고 싶어서 바짝 독이 올라 있었다.


 그런 독기 덕분인지 내 인생은 대체로 순탄하게 실패가 없는 삶이었다. 대학 입시도 가장 가고 싶은 곳 한 군데만을 써 넣는 패기로 합격했고, 웬만큼 노력하면 다 보상받는 삶을 살았다. 취직 역시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의 인턴에서 바로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며 그 흔한 '취준생' 시절 역시 겪지 못했고, 회사 내에서의 진급 심사 때도 나의 진급은 어느 정도 당연시 여겨지며 나름대로 스무스하게 살아왔다.


바로 그게 원인이었던 것 같다.


 올해 2월, 뱃 속에서 열 달을 품고 만난 아기는 너무 작고 소중했지만, 내가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실패감과 패배 의식을 안겨 줬다. 무엇 하나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간 것이 없었고,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딱히 그에 비례하는 보상이 따라오지도 않았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이번 판은 망했다고 그냥 데이터를 날리고 다시 레벨1로 돌아가서 캐릭터를 키우는 게임을 하듯 중단해 버릴 수도 없었다. 이미 나는 이 험한 세상에 작고 연약한 생명체를 소환해 놨고, 평생 (아마 죽을 때 까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와 아기만 남겨지는 하루 11시간이 너무나 지옥 같았다. 말 그대로 '무서웠다'. 그 당시 내가 쓴 일기장을 보면 너무 두렵고 무섭다는 글이 빼곡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아기를 안고 달래주어도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유튜브에서 아기 달래고 재우는 법을 검색해서 온갖 방법을 따라 도전했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 했고 아기는 목이 쉴 때까지 악을 쓰며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유니세프며 보건소며 다들 모유가 최고라며 모유 수유를 권장하는 책자까지 보내주었는데도 나는 그 놈의 모유 수유가 너무나 어려웠고 결국 채 한 달을 못 버티고 분유로 갈아 탔다. 내 가슴 두 짝이 쓸모 없게 느껴지고 쉽게 포기해버린 내가 쓰레기 엄마가 된 것만 같았다.


 어린 아기에게는 미디어 노출이 안 좋다지만, 컨텐츠를 차단하고 하루 종일 아기의 얼굴만 멍하니 들여다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 결국 TV를 켰다. 내가 무엇하나 잘 하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은 그 당시 나에게 '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내가 퇴근하고 돌아올 때 까지 둘 다 살아만 있어줘' 라고 당부하며 출근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곧 아파트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아기는 8개월차가 되었고, 나는 드디어 하나씩 내려놓으며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이 모든 정신적 고통은 사실 '완벽하게 해 내야 한다', '공부도 잘 하고 일도 잘 했던 나니까 육아에서도 만 점을 받을 것이다' 라는 굴레 속에 나를 집어 넣고 스스로 옭아매던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살기 위해 나는 그 고통을 하나씩 내려 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포기해보는 도전을 시작했다.


아직도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힐 만한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숙제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라왔던 지난 시간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무언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어렵고, 하필이면 그 무엇인가가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아들이라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내 아들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본인을 양육해줄 (정신 건강 멀쩡한) 엄마를 선물해 주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내가 고작 8개월 동안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또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완벽주의로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고통스러워 할, 엄마가 된다는 두려움이 이미 가득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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