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첫 빈

2023 Wien-München 10일, 2일 차(한국 시간 기준)

by jaee

그래 나는 어엿한 침대로부터 분리된 이후 36시간째 이동을 하고 있었고 기절각을 잴 틈을 주지 않는 낮 두 시, 빈이었다.

기차에서 내리면 일단 중앙역 얼굴을 보러 간다 부산역이든 빈 하우프트반호프든.

크게 쓰인 역명이 눈에 들어오면 여행의 시작을 알아챈 기분이 창을 활짝 연다.



이번엔 잠깐 딴생각이 들었다.


시계다. 맞다 새집에 시계가 없구나.


올 하반기는 도대체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다.

여행을 떠나기 바로 일주일 전, 회사에서 큰 행사를 치르고 바로 이틀 뒤 전셋집을 옮겼다.

풀옵션 오피스텔에서 30년 된 작은 아파트로 옮긴 터라 가구가 아무것도 없어 온갖 세간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계에서 시작한 생각이 어수선한 살림살이로 지저분하게 퍼졌지만 다행히 36시간의 고단함과 설렘이 금세 다 덮어버렸다.



ÖBB 티켓 부스부터 찾아서 빈 7일 교통권을 구입했다.

티켓 판매기는 중앙역 동쪽과 서쪽 출구를 연결하는 통로 가운데 쪽에 있다. (Manner 매장 맞은편)


저 티켓을 보니 지금도 애석한 마음이 드는 대형 사건이 여행 4일 차에 있었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기로...


교통권까지 끊으니 이제 정말 여행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마너 웨이퍼를 4년 전 잘츠부르크에서 처음으로 먹고 반했었다. 맛도 좋지만 패키지가 예뻐서. 그리고 독일어를 처음으로 공부했던 시절이라, [Manner]를 '매너'가 아닌 '마너'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게 별 거 아니지만 나에겐 특별했다.

이제는 서울에서도 여기저기서 제품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원산지에서 번듯하게 다양한 구색이 갖춰진 매장을 보니 너무 반갑고 좋았다.



마지막 유럽 여행에서 남은 돈이 272 유로나 됐다. 한국 돈으로 약 40만 원.

그 덕에 꽤 오래 현금을 따로 인출하지 않고 트래블월렛 카드와 병행해서 용돈처럼 기분 좋게 쓸 수 있었다.

빈에서 가장 처음으로 사 먹은 O'mellis의 주스. 나는 자몽 딸기 사과 레몬이 믹스된 Slim Jim을 마셨다. 미디엄 사이즈를 마셨더니 6유로, 약 8,500원이었구나.

현장에서 바로 셈을 해 본다고 해도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일본처럼 0 하나만 더 붙이면 되는 수준이 아니면, 가격표의 숫자가 작으면 돈을 흘리는 수준으로 쓰게 된다.



중앙역 동쪽 출구로 나오면 바로 ibis가 나온다. 내가 3일 머문 호텔.

메리트는 중앙역 바로 앞이라 안전하고 빈 근교 이동 시 편하고 빈 시내 접근성도 괜찮다는 점.

호텔 컨디션은 체인 비즈니스호텔답게 딱 불편하지 않은 수준으로 되어 있지만, 냉장고가 없고 카펫 바닥이다.

하고 싶은 건 다 하자는 주의인 와중에 쫄보인 나는 여행 때 숙소 고르는 기본 조건이 딱 두 가지인데, 24시간 리셉션과 늦은 밤에 들어가도 밝고 안전한 곳이다. 그다음이 위생, 특히 먼지에 예민해서 마룻바닥을 선호한다.



신나서 까불대는 골반을 가라앉히고 방에 짐을 풀고 컨디션 정상인인 척 환복하고 바로 나왔다.

첫 행선지는 시장이다. 국내외 어디서든 다른 도시에 가면 로컬 시장은 여행 초반에 가곤 한다.

사전에 빈의 찐 재래시장을 미리 찾아 두지 않아서 Naschmarkt 나슈 마르크트에 갔는데 관광지에 가까운 느낌이라 좀 아쉬웠다.


이것이 그 단순하기로 유명한 빈 지하철 노선도구만 / 마음에 들었던 지하철 플랫폼 중앙 통로


쥐띠홀러라고 발음되던 역명. 정확한 발음인데 괜히 웃겨서 여러 번 따라했다.


나슈마르크트에서 가까운 역 칼스플라츠에 내렸다.

역 출입구 바닥에는 테아터안데아빈 등 거점의 방향을 알리는 표시가 길게 멋지게 새겨져 있었고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가 있다는, 그래서 방문 예정인 Secession 제체시온도 바로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유명 도시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조금만 걸어도 오랜 사연의 유적이나 예술적인 무언가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데, 빈은 그중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가만히 선 자리에서 동서남북으로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경우가 셀 수 없었다. 게임도 이렇게 재밌게는 못 만들 거다.


안타깝게도 나슈마르크트 전체를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다. 아쉬운 대로 오이가 된 자동차샷이라도 올려 두기.



시장에서 가장 먼저 본 관광상품.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읍니다." 과연 유머 중 최고봉은 셀프 디스지.

여행 오기 전에 본 빈 배경의 영화 <우먼 인 골드>, 그 진지하고 아름다운 영화에서도 유쾌하게 사용된 밈.



와우 내 동족이 많구먼(별명: 오리) 하고 찍었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유럽은 아무래도 오리에 점령당함.

찬찬히 시장을 빨아들이듯 구경했다.


과일킬러 환장하는 풍경. 유럽의 부러운 식재료 물가


빈에도 터키 사람들이 많다. 케밥도 많고 꿀벌이 날아다니는 터키쉬 딜라이트 쇼케이스도 많고 향신료도 많다. / 귀엽지만 품질은 그저 그랬던 생쥐 치즈 플레이트


종류별로 다 먹어 보고 싶은 예쁜 패키지의 초콜렛이 많았던 Schokocompany. 뭘 먹어볼까 하다가 구경만 하고 나왔다.


마너는 자기들도 예쁜 줄 아는지 식품 외에도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있었다. 여행 초반에는 예쁘다고 다 사지 않고 우선 탐색.


나슈마르크트를 쭉 둘러보니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다.

빈의 랜드마크인 슈테판 광장을 찍고 저녁밥을 먹고 예약해 둔 오페라를 보러 가면 딱일 시간,

서둘러 시내로 향한다. Innere stadt 인네레슈타트, 말로만 들었던 바로 그 링 안쪽으로..!


담배 음식물 알코올 다 안 되지만 너희들은 된단다.



슈테판스플라츠 슈테판 광장 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와 바로 고개를 돌리니,

헉 소리 나는 성당과의 첫 만남.


바르셀로나 어느 길을 걷다가 골목 틈으로 보이던 사그라다파밀리아에 놀라움을 육성으로 터뜨렸던 기억이 났다. 건축물이 나를 압도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슈테판대성당은 규모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놀랄 만큼 웅장했다.


눈을 가리고 줄에 묶여 걷는 말이 고되어 보였다. 쉬는 시간은 언제일까 밥은 잘 줄까. 말이 있어서 더 멋져 보이는 풍경에 씁쓸했다.


혼자인 사람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 줬다. 왼쪽 사진 망한 줄 알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오른쪽 하나 더 찍었는데 지나고 보니 왼쪽도 맘에 듦



식당을 찾아 성당 옆으로 돌아 가는데, 앞에서 오던 미국인 아저씨 무리 중 한 명이 성당을 보더니 넋 나간 표정으로 Oh Fxxk! 해서 웃었다.

평소에 놀라운 걸 보곤 헉/미친/오졌다 언어 표현의 한계가 대충 이 선에서 끝나는 나 자신의 미국인 버전인가 싶어서.


빈에서의 첫 식사 이른 저녁밥은 카페 알트 빈에서 했다.

미리 찾아 둔 식당 중 한 곳으로, 아직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빈의 서민적인 맛집이라고 들었다.


여행지에서 식당 선택은 '현지인', '서민', '로컬', 같은 키워드로 찾기도 하고 여행 중 말을 섞게 되는 현지인에게 정보를 얻기도 한다. 요즘 이 근처에서 어느 식당을 좋아하냐 같은 질문으로.


여행을 길게 가도 한식은 찾지 않는다.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아침에 먹을 과일만 있으면 됨.



빈의 웬만한 식당에서 다 좋았던 점이, 알러지 표시를 꼼꼼하게 하고 있다는 거였다.

(A)는 글루텐, (B)는 어패류, (C)는 계란, (G)는 유제품 같은 식이다.


나는 굴라시 스몰 사이즈와 감자 샐러드를 주문했고 굴라시 사이드는 추천을 받아 덤플링으로 했다.

서버가 마리옹 꼬띠아르와 목소리까지 너무 닮아서 얘기했더니 안다고, 그런 말 자주 듣는다고 했다.



굴라시가 생각보다 컸지만 감자샐러드 사이즈를 보고 스케일이 큰 식당인가 보다 했는데, 아무래도 양이 너무 많았다. 계산할 때 보니 주문이 잘못 들어간 거였다. 마리옹에게 얘기했더니 미안하다며 작은 사이즈 금액으로 계산해 줬고 본인이 주방에 가서 설명했다.


주문 실수가 생기면 서로 불편하니까 정확하게 말하는 편인데 이런 사건이 빈에서 머문 5.5일 중 3회나 발생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부주의하다고...? 인종차별인가? 싶다가도 정황이나 대처로 볼 때 그건 아닌 거 같아서 다음 방문 때 좀 더 연구해 보기로 했다.



나가면서 한 컷,

굴라시는 정석적인 맛이었지만 짜서 별로였는데 감자 샐러드가 너무 좋았다. 다음번에 다른 메뉴 먹어보러 다시 갈 거다.

Wiener Staatsoper 빈 국립 오페라극장까지 시내를 쭉 가로질러 구경하면서 걸어내려 갈 계획.


조금 걷자마자 만나부렀다 방앗간.

Zanoni & Zanoni 짜오니 짜오니



아 내가 밥은 뜻하지 않게 2인분을 먹었지만 이걸 어떻게 그냥 지나쳐요...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젤라또 가게였다.

어떻게 하면 배 안 부르게 3가지 맛을 먹을까 짱구를 굴리면서 메뉴와 실물을 정독하다가 욕심을 내려놓고 한 가지 맛에 집중했다. 체리 너로 정했다.


비주얼에 기대한 맛에 부합해서 행복했지만 너무 달았다. 단 거 환장하지만 그만큼 단맛에 까탈스럽기도 함. 적당히 먹다가 중간에 버리고 콘만 먹었다.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내려오다가 바로 그 호텔 자허 영접. 카페 자허 얼마나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나 대충 분위기 파악도 해 보고 내일 다시 오마 했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비너슈타츠오퍼!



코로나 이전에는 주로 듣고 싶은 연주 일정에 맞춰서 여행 일정을 만들었는데, 이번엔 일정이 먼저였어서 그 안에서 3개의 공연을 확보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세비야의 이발사, 빈 필하모닉의 엘가와 드보르자크 심포니, 바이에른 뮌헨 발레단의 신데렐라..!


유럽에서 클래식 음악 연주회에 가면 관객들 차림새가 대부분 정중하고 흐트러짐 없는 정도였는데 여기는 빈, 그것도 주말 저녁의 오페라 공연이라 그런지 블링블링 드레스업 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렇지만 홀은 둘째치고 로비부터 너무나 아름다워서 인간이 웬만큼 빡세게 꾸미지 않는 이상 튈 수가 없다.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비너슈타츠오퍼. 다음에는 여유 있게 가고 싶다.



티켓 오픈 당일에 잠깐 다른 일 하다 좋은 자리를 다 놓쳤지만 그 덕에 또 이런 시야로 홀을 훑어볼 수 있었다.



공연을 보고 나오니 어느새 어둑해졌다.

오페라 공연이라 자막이 있지만 역시 다음엔 미리 공부를 좀 하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니까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우니까. 그리고 티켓팅은 언제 어디서나 본격적으로 덤비자.

처음으로 맞는 빈의 밤.



전차 D를 타고 중앙역까지 돌아왔고 늦게까지 운영하는 인터슈파에서 물이랑 내일 아침에 먹을 과일과 요거트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정말 길고 긴 하아아아아루였다. 침대에서 분리된 지 44시간. 마침 4가 두 개나.


호텔 룸에 전화기도 없어서 보니 웬 QR코드가 있었고 리셉션과 채팅을 할 수 있기에 말을 걸어 보았는데 숙소에 머무는 내내 답변이 없었다.



44가 45가 됐다간 5가 진짜로 나를 4지로 보낼 것 만 같아 서둘러 잘 준비를 마쳤다.


창밖으로는 중앙역 플랫폼이 내려다 보였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역이 Wien Hauptbahnhof란다.

Wien Hauptbahnhof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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