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Wien-München 10일, 3일 차
사진도 할 말도 너무 많은데 글도 좀 갖춰서 쓰려니 이러다 중도에 나가떨어질까 싶어 이제 좀 편안하게 가 보려 한다. 어차피 브런치는 나를 받아줬음이야. 이제 나는 여기서 물건만 안 팔면 될 뿐이야.
웃음기 쏙 빼고 글 쓰는 것도 답답해서 이제 내 멋대로 한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보니 수저가 없는 것. 조식 운영 중인 뷔페에 내려가서 빌려 왔다.
머무는 내내 잘 쓰다가 마지막날 씻어서 반납했다.
오늘도 갈길이 먼 하루였다.
새벽같이 서둘러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도착한 곳은 무려 Wiener Zentralfriedhof
빈 공동묘지
버스를 잘못 내리는 바람에 정문이 아닌 다른 입구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여러 묘지를 지나쳐야 했다.
아무도 없는 공동묘지가 차고 습했는데 초딩시절 필수 이수과정인 공포특급 OO괴담에 빅데이터에 의하면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잠깐 으스스…
드디어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좋아하는 두 분을 위해 하얀 카네이션을 두 송이 샀다.
내가 가려는 곳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32A, Musiker
한 번에 만난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모차르트
공동묘지에 아올라갔더니 아시체가 벌떡 시체가 벌떡 벌떡 벌떡 벌떡벌떡벌떡(이 노래 아는 사람?) 해도 기절 안 할게요 한 번만 나타나 주시면 안 될까요.
공동묘지에서 아는 분들을 뵈니(?) 무서움이 어느새 가셨다.
천천히 둘러보다가 산책하는 분이 계셔서 베토벤께 헌화하는 사진을 부탁했더니 꽃 나머지 한 송이는 누구 것이냐며 그것도 찍어주겠다고 하셨다. 쏘 스위트.
그렇게 베토벤께 한 송이, 슈베르트 앞에 한 송이.
브람스 모차르트 죄송… 최애는 최애니까욘…
빈 터줏대감들께 새벽같이 인사드렸으니 이제 정말 여행을 시작해도 되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찾은 곳은 바로
무려 뵈젠도르퍼슈트라쎄의 무려 무지크페라인.
세계 3대 피아노 중 하나인 뵈젠도르퍼의 메인 살롱이 있는 거리에 세계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홀.
길에 서 있는 자체로 가슴이 벅찼다.
뵈젠도르퍼 살롱은 내일 다시 올 거라고 눈도장만 찍고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러 일단 무지크페라인에 입성했다.
이번 여행은 공연에 맞춰 계획한 게 아니기에 공연을 여행 스케줄에 맞춰 예매해서 프로그램에 큰 기대나 설렘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과연?)
엇쭈 요즘 나 고생시키는 리스트 발견.
리스트 작품 취향 아니고 손에도 안 맞는데 연주효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할 때가 많다.
그의 음악이 드라마틱하고 화려하고 그래서 대중적이라는 방증.
과연 19세기 오이로파 아이도루…
여유 있게 왔더니 시간이 많이 남아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작은 토르테 하나에 다진 채소와 올리브가 올라간 브루스케타 하나를 골랐다.
Gerstner 게르슈트너 제품이 들어와 있었는데
돌이켜 보니 여행 내내 맛본 빈의 유명 자허토르테 4종(자허, 데멜, 임페리얼, 오벨라) 다 꺾고 여기가 제일 맛있었다.
안일했다.
티켓팅부터 안일했던 바람에 매진이 되어 스탠딩석을 예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공연 당일에도 안일하게 요기하는 사이에 스탠딩 R석이 다 차부렀다. 호호
그래도 홀이랑 빈 현지에서 빈필을 경험하러 온 거니까 호호 어차피 프로그램이 내가 좋아하는 곡은 아니니까 호호 하면서 아예 홀 뒷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았다.
는 무슨... 드보르자크 심포니 악장마다 광광 울었다.
눈물이 터져 나오는데 그거 때문에 소리가 안 들릴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세계에서 가장 음향이 좋은 홀이라더니 정말이었다.
작고 섬세한 소리에서 그 진가가 드러났다.
실크의 얇디얇은 단면이 칼이 되어 나를 베고 가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소리가 잠자리 날개보다도 무엇보다도 얇아서, 또 무엇보다도 강해서 나를 완전히 통과해 지나가는.
나는 분명 공연장의 가장 뒷자리 그것도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그 가느다란 소리가 모든 이를 지나 나에게까지 와 주었다.
경이로웠다.
이 아름다운 홀을 무중력으로 넘실대며 휘감았던 비단 같은 소리.
나는 왜 드보르작 신세계로부터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연주가 별로였고 너무 흔한 곡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고 왔던 것인데
역시 흔해진 데는 이유가 있었고 좋은 연주로 들으니 그야말로 넉다운이었다.
그동안 들었던 몇몇 형편없던 연주가 이날의 경험에 더 뚜렷하게 비교가 되었다.
아무렇게나 뻗친 짚을 한데 묶어 만든 제멋대로인 빗자루라고 할 수 있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중력 비단은 어디로든 다니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다음에 빈에 다시 올 땐 꼭 좋은 자리에서 다시 들어보겠노라 다짐하며 홀에서 가장 늦게 빠져나왔다.
공연을 선택할 때엔 작품에 기준을 두고 여러 홀과 연주자로 들어보는 게 이상적이라 생각하는데
무지크페라인과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예외가 되었다. 여긴 이 자체로 기준이 된다.
최근 몇 년 간 들었던 연주 중 최고였다.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나가지 않고 박수를 보내던 관중들
나오는 길,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듯한 얼굴의 클라라 슈만과 마주쳤다.
클라라 비크가 클라라 슈만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위로를 건네려는 차에 저 희미한 미소가 답을 주는 거 같았다. 나는 내 삶을 사랑했다고.
다음 빈 여행 재방문 1순위일 무지크페라인을 빠져나오니 늦은 점심시간,
바로 옆에 있는 임페리얼 호텔 카페에서 식사를 했다.
날이 약간 쌀쌀해서 따뜻한 수프와 함께 독일에서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인 압펠슈트루델을 시켰다.
담당 서버가 수프와 함께 빵과 버터를 가져다 주기에 나는 빵을 별도로 주문하지 않았다 하니, 프리라면서 식사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가격대가 있는 만큼 서비스가 좋군 하면서 버터와 빵 하나를 먹고 배불러서 남겨서 미안하다고까지 했는데... 계산할 때 보니 추가 비용이 있었다. 2차 눈탱이 사건 발생.
계산원에게 이야기하니 담당 서버와 얘기하고 돌아오더니 수습생이라서 실수했다면서 사과하고 비용을 빼줬다. 그래도 잘 먹긴 했으니, 미안한 마음에 에스테르하지 토르테 하나 포장했다.
일요일은 베토벤 박물관과 슈베르트 생가, 베토벤이 10년 거주한 집이 무료로 개방하는 날이다.
이날 하루 동안 다 볼 작정으로 얼른 식사를 마치고 서둘렀다.
첫 번째 방문지는 무려 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하일리겐슈타트.
"죽음이여 언제든지 올 테면 와 보라. 나는 용감하게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로 맺는 그의 유서.
그 이후, 들리지 않는 귀로 교향곡 2번을 완성하고 5번 운명, 6번 전원, 피아노 협주곡 4번 등을 창작해 냈다.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이 죽음의 한가운데서 예술에 대한 열망을 터뜨렸던, 유서라기보다는 니체의 위버멘쉬가 존재했다면 바로 베토벤이 아니었을까 싶게 하는 바로 그 외침, 외침의 성지로.
선생님 안녕하세요? 드디어 제가 왔습니다.
오스트리아 여행 전반에서 아쉬웠던 게 기념품 샵이었다... 너무 퀄리티가 떨어져서 살 게 없음.
그나마 벨베데레 궁전의 샵이 볼 만했고 음악 관련은 너무 별로였다.
여행 중에 에코백 조금만 예뻐도 환장하고 사는 편인데 에코백마저도 별로였다.
도시가 디자인 역량을 주로 찐 작품활동이나 디저트에 몰빵하나 싶었을 정도.
킹 받게 생긴 베토벤 고무 오리도 품질이 썩 마음에 안 들어서 안 샀는데 그냥 킹 받는 맛에 살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다음은 슈베르트가 태어난 집이었다.
서른한 살에 죽은 청년의 유일한 유품.
평생 자기 피아노조차 가져보지 못한 가난한 예술가는 그 짧은 생 동안 무려 998곡의 작품을 남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즉흥곡과 방랑자 환상곡에는 미치게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다른 그 어떤 작품에도 없는 특유의 애수 어린 반짝임이 슈베르트의 모든 것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세상 그 무얼 가져도 그보다 반짝일 수는 없다.
그래서 신은 슈베르트에게 안경 하나만 허락했는지도 모르겠다.
슬펐다.
안경 하나 보러 온 건데 정말 안경 하나만 있었다.
근데 그게 안경이라 다행이었다.
이제 다시 링 안쪽으로 들어와 베토벤이 10년 살았던 집에 왔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마다 밖에 이렇게 같은 디자인의 간판과 깃발로 표시를 해 둬서 찾기가 편했고
어디서든 이 표시가 보이면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됐다.
흘러 흘러 아름다운 왕궁정원을 스쳐 무제움스크바르티어까지 왔다.
입점 샵 폐점 시간이라 둘러보고 음료를 마시는 정도로 잠시 머물렀다.
3차 눈탱이 사건은 MQ 내 Kantine이라는 식당에서.
바질, 오이, 레몬이 들었다는 프레시 가든 레모네이드 0.3L를 주문했다.
주문 오류 방지를 위해 small one이라고 두 번 말하고 0.3L라고도 다시 확인했다.
잔이 생각보다 큰데 500ml는 아닌 것 같아서 설마설마했는데 나갈 때 계산하려 하니 5.90유로라고 함... 도라방스. 내가 작은 것 달라고 여러 번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물어보니 미안하다면서 4.60유로로 계산해 줬다.
반복되는 패턴에 이 사람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었다.
근데 또 웃긴 건 눈탱이 사건이라 하면서도 눈탱이 다 피했음.
경로가 기억 안 나는데 어쨌든 또 흘러 흘러 링 거의 한가운데 있는 BILLA(슈퍼마켓)에 왔고
입구에 델리 뷔페를 제공하는 Henry가 있어서 저녁을 먹었다.
배가 작아서 이것저것 조금씩 먹는 편이라 이런 식당을 좋아한다. 여긴 주로 후무스, 커리 등의 구성이었음.
천천히 걸어 호텔로 돌아가다 젤라토 가게가 보여서 들어갔는데 꽤 유명한 집이었다.
피스타치오 맛을 시켜 봤는데 녹진하고 고소한 콩가루맛에 피스타치오 향이 은은하게 나서 맛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Gerstner. 일정이 빡세긴 했는지, 낮에 뮤지크페라인에서 맛본 디저트 브랜드라는 것을 망각하고 아 이거 낯익네 하고 구경하러 들어감;;
와 와 예쁜 거 많다 하지만 나는 임페리얼의 에스터하지가 있지. 다시 오자. 생각하고 여행 내내 다시 방문하지 못한 대 실수. 여행 초반이라 아직 먹을 길이 멀어 부주의했다… 반성…
이번 빈 여행에서 가장 맛있었던 디저트는 카페 첸트랄의 비건 자두 타르트와 게르슈트너의 쁘띠 푸 토르테였음. 다음에 꼭 다시 먹으리.
바로 옆에 스벅이 있어서 그냥 뭐 있나 구경하러 가서 쇼케이스를 들여다봤는데
화려한 빈의 디저트를 보고 나서인지 한껏 초라한 불량식품 같았다.
그리고 나도 고단함에 한껏 찌그러들어서 다음날을 위해 전투적으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