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북핵 위기가 고조되고 미국과 북한이 한창 설전을 벌였을 때,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조롱하기 위해 '로켓맨(Rocketman)'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40년도 더 전 영국에서 '엘튼 존'이 '로켓맨'을 발표했을 때 그 자신도 로켓맨이 이런 식으로 회자될 줄은 상상 못 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전기(傳記) 영화(가 제작되고 그 영화의) 제목이 로켓맨이 될 줄 역시 당시엔 몰랐겠지만.
엘튼 존의 삶을 다룬 로켓맨은 개봉 전부터 지난해 국내에서 10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끌어들이며 광풍을 일으킨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동성애자이자 약물 중독에 빠졌던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삶이 닮아있는 것은 물론,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이 보헤미안 랩소디 제작에 참여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행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로켓맨'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절반의 절반에도 미치기 힘들 거라 감히 예상해 본다. 영화의 완성도나 영화에 사용된 음악의 지명도 때문이 아니다. 귀에 익숙한 히트곡으로 치자면 엘튼 존이 오히려 퀸보다 한 수 위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뚜렷한 클라이맥스가 없는 완만한 구성, 영화 외부에서 연결고리를 찾을 만한 흥행 요소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 이 영화 '흥행' 측면에서의 한계로 보인다.
엘튼 존(태런 에저튼 분)이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로켓맨'의 오프닝 장면
영화의 시작은 보헤미안 랩소디와 몹시 비슷하다. 현란한 무대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엘튼 존의 모습은 라이브 에이드 무대로 달려 나가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내 로켓맨의 엘튼 존이 향하는 곳은 무대가 아닌, 약물 중독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보호소 내 모임 장소란 것이 밝혀진다. 이후 영화는 엘튼 존의 회상을 통해 과거로 회귀, 그의 음악적 성공과 내면의 고통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음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 음악적 동지이자 평생의 친구(보헤미안 랩소디에선 퀸 멤버들, 로켓맨에선 작사가 버니 토핀)와의 만남,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 발견, 어마어마한 음악적 성공, 의지했던 동성 애인의 배신, 오랜 음악적 친구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하기까지 두 영화의 전개 과정은 몹시 유사하다. 하지만 두 영화의 분위기는 장조와 단조만큼이나 다르다. 왜일까.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 머큐리의 굴곡진 삶이 결국 웸블리 구장에서 열리는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이란 정점(頂點)을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만난 친구의 배신, 알코올 중독 같은 장애물이 동료와 가족의 도움으로 극복됨으로써 영화가 정점에 도달해 프레디가 무대를 누빌 때쯤엔 관객들은 거리낌 없이 한껏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이에 반해 로켓맨에선 평생의 음악적 동지인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 역시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하지만 또 다른 버팀목이 돼줘야 할 가족이 (마지막에 화해했다고는 하지만) 평생 그를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었음이 밝혀진다. 이처럼 갈등이 깔끔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말 부분을 뜨겁게 달궈줄 라이브 에이드 같은 공연 장면도 없다 보니,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도 응어리가 풀리긴커녕 뭔가 찜찜한 느낌을 안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게다가 동성애와 술, 마약에 대한 묘사가 보다 노골적이어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무겁다. 이래저래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을 몰고 온 기존 관람객들의 2회차, 3회차 재관람을 기대하기 힘들어 보이는 이유다.
'보헤미안 랩소디 '중 퀸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 장면.
보헤미안 랩소디의 성공은 단지 영화 내부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영화의 백미(白眉)인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1985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영화를 보고 온(혹은 보기 전) 관객들은 유튜브를 통해 과거 라이브 에이드 영상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 다시 영화의 내용을 반추하면서 감동을 재음미했다. 이러한 감동을 다시 느끼고자 재차, 삼차 영화관을 찾은 팬들이 예상 밖 대박 흥행을 이끈 핵심 요인이라 하겠다.
또한 공연 장면을 최대한 실제 공연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다 보니 자연히 영화와 실제 공연이 비교 대상이 됐다. 영화 안팎에선 영화가 얼마나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와 몸짓 하나하나를 잘 구현해냈는지가 화제가 됐다. 덕분에 퀸의 팬뿐만 아니라 퀸의 음악을 처음 접한 20~30대로까지 열풍이 확산됐고, 영화관에서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는 싱어롱 상영관을 통한 '떼창' 관람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면서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은 마니아층을 넘어 전국민적인 광풍으로 거듭나게 됐다.
'로켓맨' 중 LA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공연하는 엘튼 존
로켓맨에는 이처럼 관람객들이 집에 돌아가 다시 찾아볼 만한 이정표적인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저스 스타디움 공연을 비롯한 다수의 공연 장면이 등장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집에 와서도 되새김질할 만큼 도드라지는 장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영화 속 엘튼 존이 실제 엘튼 존의 화려한 무대 의상과 안경을 얼마나 비슷하게 재현해냈는지가 관심거리일 듯싶은데, 친절하게도 영화 말미에 영화 속 엘튼 존과 실제 엘튼 존의 당시 사진을 대비시켜 줌으로써 관객들이 굳이 과거 영상을 찾아봐야 하는 수고를 덜어줬다.
각각 '죽은 자'와 '산 자'를 다뤘다는 근본적인 차이도 닮은 듯 서로 다른 두 영화가 결이 다른 결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듯하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됐기에 퀸의 프레디 머큐리의 삶은 완결된 '기승전결'을 갖고 있지만, 아직 '살아있는' 전설인 엘튼 존의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드러머 존 보냄의 죽음과 함께 해체된 '레드 제플린'과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여전히 활동 중인 라이벌 '딥 퍼플'의 관계와 비견된다고 할까.
지난 6월 5일 LA다저스의 선발로 출전한 류현진이 동료들이 무려 3개의 실책을 저지르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무실점으로 시즌 9승째를 거두며 메이저리그 다승, 방어율 등등에서 1위를 이어나갔다. 경기 결과를 속속들이 아는데도 자꾸만 하이라이트 영상을 찾아서 보고 또 보게 됐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다시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찼았던 관객들의 마음이 이와 비슷할 것 같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프레디 머큐리는 승리했고 그 과정은 반복해서 보더라도 다시금 벅찬 감동을 준다. 영상 속에서 프레디와 관객은 'We are the Champion'으로 거듭나며 정서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에 반해 로켓맨을 보는 관객의 심정은 류현진이 이기지 못한 게임(졌거나 승패 없이 물러났거나)을 보는 것과 비슷한 심정일 듯싶다. 그동안 힘들게 싸웠다는 걸 알겠고 기꺼이 응원해주고 싶지만 굳이 그 과정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 (**사족: 국내에서 뛰었을 때 한화 이글스 소속이었던 류현진은 최근 인터뷰<7월14일자 연합뉴스>에서 은퇴는 친정인 한화에서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면서 '한화 경기는 이긴 경기만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본다'고 말했다.)
물론 경기의 질을 따지자면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두 영상의 조회수를 따진다면 결과는 너무도 뻔해 보인다.
<TMI> 보헤미안 랩소디와 마찬가지로 로켓맨에서도 영화의 극적 재미를 위해 실제와 다르게 구성한 부분이 적지 않다. 본명이 '레지널드 드와이트'였던 주인공이 '엘튼 존'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하게 된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선 드와이트가 '엘튼 딘(Elton Dean)'이란 자신의 밴드 멤버에게 그 이름을 자신의 예명으로 사용하겠다고 했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면박을 당한다. 이후 음반을 내기 위해 찾아간 음반회사에서 이름을 묻자 주인공은 '엘튼'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성이 뭐냐'고 묻자 회사 벽에 걸려있는 비틀스 사진의 '존 레넌(John Lennon)'을 보고는 "존, 엘튼 존"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엘튼 존이란 이름은 영화에도 등장한 밴드 멤버(색소폰 연주자) '엘튼 딘'과 또 다른 밴드 멤버 '롱 존 볼드리(Long John Baldry)'의 이름에서 각각 따왔다는 게 정설(定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