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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 스위치를 점화하는 기술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공감하게 될까

by 늦깎이

"앙~~ 나 자리에 앉을 거야!"

출근시간대, 한 꼬마의 앙앙 대는 소리에 버스 앞쪽이 시끄러워졌다. 빈자리가 없는데도 자꾸만 앉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탄 할머니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했다. 승객들은 무관심한 듯했지만 아이 목소리가 워낙 컸기에 저마다 속으로 한 마디씩 했을 거다. 당시 버스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고 출근 시간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르긴 해도 상당수는 '저 할머니는 왜 가뜩이나 붐비는 출근 시간에 애를 데리고 버스에 타서 이 사단을 만드나'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 역시 아이가 징징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비난의 화살은 다른 쪽을 향했다. '네댓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가 저렇게 온몸으로 외쳐대는데 자리 좀 양보해주면 안 되나'하고 생각하며 아이가 서있던 앞자리에 앉아있던 승객을 못마땅해한 것이다. 결국 아이 할머니가 앞자리 승객에게 '곧 내리는데 자리 좀 잠깐만 양보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해 아이는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 앉았고 버스는 평화를 되찾았다.

내가 아이와 아이 할머니 입장을 이해한 것은 나 역시 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저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그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로 못하는 아이 할머니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역지사지(易地思之) 스위치'가 켜졌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저럴 일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서 관용이나 공감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라는 뜻의 역지사지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사자성어도 드물 것이다. 한편으로 역지사지만큼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기 힘든 말도 찾기 힘들다. 말로는 역지사지를 달고 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상 이해관계가 걸리면 자기 입장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처럼 정치권, 남녀, 세대 간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역지사지만큼 절실하면서 공허한 단어도 없는 듯싶다. 우리 뇌 속에서 꺼져있는, 유명무실한 역지사지 스위치를 켜는 방법은 없을까.

얼마 전 제주도에 사는 11살 어린이 작가가 가족과 함께 방문한 레스토랑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사연이 온라인상에 알려져 네티즌들의 공감을 샀다. 동생 생일을 맞아 온 가족이 동생이 좋아하는 식당을 찾았는데, 그새 그곳이 '노키즈 존(No Kids Zone)'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이에 실망한 동생이 우는 바람에 가족 모두가 슬퍼했다는 사연이다.

사연을 자신의 SNS에 올린 아이는 “어른들이 조용히 있고 싶고 아이들이 없어야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난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난 생각한다.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것을.. 그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 거니까"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어른들은 잊고 있나 보다. 어른들도 그 어린이였다는 사실을"이라고 말했다. 이 글에 '어른으로서 어린이의 권리를 제한해서 미안하다'는 등 글 쓴 아이의 입장에 공감하는 수 백개의 댓글이 이어졌다.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작성자가 어린아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겠지만 이 글은 형식적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몹시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다. 우선 “어른들이 조용히 있고 싶고 아이들이 없어야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난 이해할 수 있다"며 먼저 역지사지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어른들도 한때는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며 상대방의 역지사지를 촉구한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글을 쓴 이가 자신이 당한 피해의 부당함을 직접 지적하는 대신, 자신보다 약자인 동생을 대변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나한테 그러는 것까진 참겠는데, 나보다 어린 동생한테까지 그러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요'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이나 권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엔 공감하기 어렵다. 저의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도 피해자이면서 자기 피해를 내세우기보다는 다른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그런 주장엔 보다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결국 서로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는 상대가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는 제스처를 취할 때 비로소 '역지사지 스위치'가 점화되는 것이다. 자신은 손톱만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어떻게 감정이입이 되겠는가.

내가 제일 아프다고 징징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와 비례해 자신의 상처는 잠시 제쳐놓은 채 '난 괜찮으니 저 친구부터 돌봐주시게'라고 말하는 진짜 어른은 갈수록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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