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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새끼나 예쁘지'에 대한 반론

자기 권리를 100% 활용하고, 법대로 하자는 사회가 과연 행복할까

by 늦깎이

카페에서 유모차에 앉아있는 돌잡이쯤 돼 보이는 아이가 '꺅'하고 소리를 질렀다. 옛날 같으면 인상을 찡그리거나 조건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테지만, 가급적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의 엄마가 얼마나 당황하고 민망해할지 알기 때문이다.


소리 지르는 아이에게서 불쾌감(?)을 느끼는 대신 아이 엄마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건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외식하러 나갔을 때 와이프와 함께 아이가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기억. 비슷한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아이의 돌발행동에 곧바로 돌아보는 1차원적 반응을 보이기보다, 아이의 행동에 가슴 졸일 아이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보다 진화한(?) 반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얼마 전 '노키즈존(No Kids Zone)' 논란에 대해 쓴 신문 외부 칼럼을 보고 공감한 적이 있다. 필자는 "노키즈존이 개별 선택 차원을 넘어 일종의 ‘현상’이 되고, 그마저 넘어서 일반적 ‘업태’로 자리 잡고 있다면 그 흐름에는 분명 문제 제기와 개선이 필요하다"며 "문제 될 게 없다는 주장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동아일보 4/2 A33면 '네 새끼, 혹은 우리의 아이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부 몰상식한 중장년층을 받지 않는 식당이나, 몰지각한 일부 한국인 관광객의 행태 때문에 해외에서 한국인 사절 식당 바람이 분다면 납득할 수 있겠냐며 "그렇지 않은데 노키즈존의 확산에만 쉽게 동의할 수 있다면 그 저변에는 아동혐오가 숨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꼬집었다.


위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부 고슴도치 부모들의 눈꼴사나운 자식사랑에 반발해 '니 새끼 너한테나 예쁘지'란 냉소적인 표현이 공감을 얻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한텐 피해 주지 마'란 얘기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남한테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당신들도 한때 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던 아이였으니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혹자는 안 주고 안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누구든 흔한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의 호의나 불편에 기대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렵다. 식당에서 종업원이 친절하지 않다고 불만을 터뜨려 본 경험이 있다면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불한 음식값에 종업원의 호의나 친절도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할까?


식당 종업원의 근로계약서엔 음식을 나르고 뒷정리를 하도록 명시돼 있을지는 몰라도 손님에게 미소를 지으라는 구절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업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친절은 어찌 보면 덤이다. 종업원 입장에선 반복적으로 친절한 '척'해야 하는 건 '불편'한 일일 가능성이 크지만 기꺼이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하는 것이다. 그 대가로 손님들은 보다 나은 서비스를 받고 나아가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이처럼 개개인 차원에서 작은 불편 정도는 무심히 참아내는 행동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이건 내 권리니까 당연한 것'이라며 자신이 가진 권리를 100% 활용하려 하고, 걸핏하면 법대로 하자며 사소한 갈등에도 법을 끌어들이게 되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살 맛 나는 곳이 될 '여지'가 남아나지 않는다. 여지가 없는 사회는 점점 더 각박해지고 숨쉬기 어려워진다. 누구든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카페에 있는 40~50분 동안 아이가 '꺅'소리를 낸 횟수는 다 해서 4~5번 정도 됐던 것 같다. 모두 합쳐봐야 5초가 되지 않는 시간이다. 아이로 인해 내가 실제로 피해를 본 시간을 따져보면 끽해야 그 정도인 셈이다. 이를 카페에서 방해받지 않을 자신의 권리가 침해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이가 카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해 아이가 어떻게 나오나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민폐'의 총량으로 치자면 카페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시끄럽게 전화통화를 하는 어른들이 더하면 더할 거다.


남의 자식이 이뻐 보이긴 쉽지 않다. 하지만 남의 자식도 이뻐 보이는 사람은 분명 자기 자식만 예뻐 보이거나 남의 자식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보다 행복할 것이다. 이런 사람 눈엔 세상에 예뻐 보이는 게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려면 남의 자식까지 예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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