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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사심(私心)

기왕 돈 쓰는 거 아빠도 같이 즐거우면 '일석이조' 아닌가

by 늦깎이

부모가 되면 주로 양보하고 때론 포기해야 한다. 아이가 없을 땐 '누가 양보할 것이냐'를 두고 부부간에 기싸움도 하고 다투기도 하지만, 아이 앞에선 양보나 포기가 더 이상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다 큰 어른이 어린애와 먹는 걸 갖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럼에도 종종 사심(私心)이 앞설 때가 있다. 영화를 볼 때 기왕이면 나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봤으면 하고, 아들 장난감을 살 때도 기왕이면 내가 조립해주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제품을 샀으면 하고 바라는 식이다. 나름 명분도 있다. 기왕에 돈 쓰는 거 아빠도 같이 즐거우면 일석이조(一石二鳥) 아니겠는가 하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사실 사심을 채우려고 은근히 내 취향을 강요했던 적도 적지 않다. 아들과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가 '뽀로로'가 아닌 '빅 히어로(Big Hero)'였던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아들의 장난감 취향이 빠방(자동차)을 넘어 로보트 단계에 진입하면서부터는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하곤 했다.

레고를 살 땐 기왕이면 '스타워즈' 시리즈를 사도록 부추겼다(심지어 해외 출장 간 와이프에게 당시 4살이었던 아들 핑계로 고가의 성인용인 '밀레니엄 팔콘'을 사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음악도 일찌감치 '마이클 잭슨'이나 록(rock)을 들려주며 아빠 취향을 따라오길 기대했다(이 부분은 아이가 만화영화 주제곡을 듣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아들이 5살 때쯤이었다. 한 번은 로보트를 사달라고 조르기에 휴대폰으로 조립식 건담(내가 정말 만들어보고 싶었다..)을 보여주며 '이걸 사는 게 어떻겠냐'고 살살 꼬드겼다.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넘어간 아들도 결국 동의했다.

하지만 막상 문방구에 가서 변신 로보트를 보는 순간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발동, '이걸 사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시점에 포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난 로보트 상자를 끌어안은 다섯 살 아들을 세워놓고 이것보다 건담이 더 멋진 갖가지 이유를 설명하며 회유에 나섰다. 10분이 넘게 실랑이를 벌이자, 보다 못한 문방구 주인이 '거 애가 좋아하는 걸로 사주세요'라고 거들고 나섰다. 결국 돈은 돈대로 쓰고 생색은커녕 욕만 먹는 꼴이 됐다.


무섭게 자라나는 키만큼이나 아이의 취향도 빠르게 변해간다. 고무적인 건 아들이 나이가 들면서 부자(父子) 간에 교집합이 이뤄지는 취향 또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함께 보러 갔을 때처럼 서로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도 있다. 액션 영화를 싫어하는 와이프와 단 둘이었다면 극장에서 보는 건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을 텐데, 슈퍼히어로를 좋아하는 아들 덕분에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울 수 있게 된 셈이다. '프리스비'나 '캐치볼'을 할 때도 처음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원반과 공을 주우러 다니기 바빴는데, 이젠 제법 내 쪽으로 제구가 되곤 한다. 일방적으로 '놀아주는' 단계를 지나 비로소 같이 '놀 만한' 수준이 된 셈이다.


이렇게 아들과 같이 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더니 이제 아들도 동네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은 놀이터에 가거나 킥보드를 탈 때 옆에서 지켜봐 줘야 하고, 아빠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불안한지 큰소리로 '아빠'를 외치는 녀석이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혼자 나가 놀기 시작할 거다. '심심하다'고 마룻바닥에 대자로 누워 징징 대는 걸 볼 날도 얼마나 남았으려나. 사춘기가 되면 얼굴 좀 보여달라고 사정해도 자기 방에 처박혀 두문불출할지도 모르겠다.


자식한테도 사심이 앞서던 '초보 아빠'는 미숙하고 어색하던 아빠 노릇이 이제 좀 익숙해지는가 싶은데, 그런 아빠 맘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은 자꾸자꾸 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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