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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콤플렉스가 없는 세대

소니 워크맨, 일본 애니메이션에 주눅들던 90년대 학번은 모르는 요즘애들

by 늦깎이

최근 '90년대생'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마침 조간신문을 읽다 요즘 20~30대를 분석한 대목에 눈길이 갔다. 인터뷰이가 "이들은 일본·미국 등에 콤플렉스가 없다"고 한 부분인데, 이와 관련해 여러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들(*20~30대)은 부모 세대의 경제력 덕분으로 선진국의 제도와 문화를 체화했다. 글로벌 감각을 갖고 있다. 가령 법질서를 무시하는 민노총의 행태는 이 친구들 눈에는 '저 아저씨들은 왜 저럴까'로 비칠 뿐이다. 깡패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일본·미국 등에 콤플렉스가 없다. 현 정권이 부추겨 온 '반일 민족주의'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조선일보 7월 8일 자 '최보식이 만난 사람'의 '주대환 바른미래당 혁신위원장' 인터뷰 중에서)


어느덧 40줄에 접어든, 나 같은 90년대 학번 세대는 일본과 미국, 그중에서도 특히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졌다. Sony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AIWA 워크맨의 날렵한 디자인은 '두툼'했던 삼성과 LG의 동급 제품을 주눅 들게 했다. 일본 문화 수입이 금지됐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던 'X 재팬' 같은 일본 그룹의 음악이나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으로 대변되는 일본 영화의 섬세한 질감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세상 작품처럼 느껴졌다. 단적으로, 90년대 국내 최고의 아이돌이었던 서태지의 예명 태지는 X 재팬의 베이시스트 타이지(Taiji)에서 따왔다.


전 세계가 바라보는 일본의 위상 또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1990년 기준 일본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이미 3만 달러에 육박하며 당시 우리나라의 4배에 가까웠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를 밥 먹듯이 패싱하던 할리우드 스타들은 뻔질나게 일본을 드나들었고 마이클 잭슨 같은 거물 스타의 전 세계 투어에서 우리와 달리 일본이 빠지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급기야 1980년대 말 일본이 마이클 잭슨, 조지 마이클 등이 소속된 미국의 대형 음반사 CBS와 영화제작사 콜럼비아픽처스를 잇따라 인수하자 일본의 자본이 미국 부동산은 물론 미국의 문화자본마저 집어삼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세계에서 한국 사람만 일본 사람을 '쪽발이'라며 무시한다는 얘기는 역설적으로 일본에 대한 우리의 지독한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랬기에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일본 문화를 개방했을 때 '이제는 일본 문화를 쉽게 누릴 수 있겠구나' 내심 반기면서도 우리나라 문화가 다 죽을 거라던 문화계 일각의 아우성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당시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적 측면에서도 다수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인정하긴 싫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우리나라가 일본을 따라잡을 날은 오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거북이와 경주에 나선 토끼마냥 자만에 빠진 기술의 소니가 주요 기술의 변곡점에서 결정적인 오판을 거듭하며 삼성에 따라잡히는가 하면, 단숨에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날려버릴 듯했던 일본 영화나 대중음악의 공세는 미풍에 그쳤다. 오히려 우리나라 드라마가 한류란 바람을 타고 일본에 전파돼 일본 중장년 여성들의 여심(女心)을 흔들어놨다.


그때만 해도 빗맞은 안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첨단 IT기술이 휴대전화로 집중되며 삼성과 소니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고, 음악 시장에선 우리나라에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던 '보아'란 10대 신인 가수가 일본에서 데뷔해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다. 일본 주류(主流) 음악시장에서 한국 음악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국내에서 여자 아이돌의 새 장을 열었던 SES조차 뚫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일본 시장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보아를 필두로 동방신기, 소녀시대, 카라, 최근의 BTS, 트와이스, 아이즈원까지 어느덧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한국 가수들의 이름을 듣는 건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다시금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건 지난해 엠넷에서 방영한 '프로듀스48'이란 음악 프로그램을 보면서다. 일본에서 현재 '활동 중인' 아이돌그룹 AKB48 소속 출연자들이 아직 데뷔하지도 않은 우리나라 연습생들과 48명씩 동수(同數)로 출전해 최종 12명의 데뷔조를 가리는 프로그램이었다.


AKB48은 전성기를 지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일본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다(젊은층보다 아저씨들이 주요 팬층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더구나 과거 프로야구 '한일 슈퍼게임'처럼 일본에서 2진을 내보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 측 참가자들 면면을 살펴보면 마츠이 주리나, 미야와키 사쿠라처럼 AKB그룹 내에서도 톱을 다투는 최고 선수들이 대거 포진했다. 하지만 양측이 서로를 처음 대면한 날, 우리 연습생들의 춤과 노래 실력을 눈으로 직접 지켜본 일본 '프로' 아이돌들의 입에서 울먹임과 함께 이런 얘기가 흘러나왔다.


'(한국 연습생들은)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 아이돌은 (일본) 밖에 나가면 인정받지 못한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실제로 첫날 실력 평가를 통해 등급별로 반 배정을 한 결과, 우리나라 연습생들이 대부분 A, B 등급을 비롯한 중상위권에 배치된 데 반해 일본 아이돌들은 C, D, F 등급에 몰렸다.


문호 개방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음악계에서 흔히 하던 얘기가 (근거는 알 수 없지만) 미국은 우리보다 20~30년, 일본은 우리보다 10~20년 정도 앞서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일본 문화가 개방된 지 20년 만에 반대로 일본 아이돌들이 (대중음악에 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분루를 삼키며 한국을 한 수 위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 대중문화는 이제 일본을 넘어선 데 이어 미국마저 넘보고 있다.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빌보드 상단에 이름을 올렸을 때까지만 해도 유튜브의 부상에 운 좋게 편승한 '행운'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BTS(방탄소년단)가 한국말로 녹음한 3개 앨범을 연달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려놓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팝음악만 틀어주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아메리칸 톱40(빌보드 차트 1~40위)를 소개하면서 우리말로 된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틀어주는 상황이 우리 또래에겐 여전히 몹시도 어색하지만..


여하튼 오리콘 차트는 물론이거니와 빌보드 차트에서도 우리나라 가수의 노래를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일본 10대가 글로벌 가수가 되고 싶다며 한국으로 유학을 오는 시대를 사는 요즘 세대가 일본에 열등감을 갖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의 수출 제재 조치가 일본 국내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어느덧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머리가 굵어진 한국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일본인들의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란 생각도 든다.


열등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얘기다. 박세리가 처음에 LPGA 투어에서 우승했을 때만 해도 기성세대들은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라며 한때의 이변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박세리의 활약을 보고 자란 90년대생 세리 키즈들에게 LPGA 투어는 더 이상 꿈의 무대가 아니었다.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현실의 목표'가 된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LPGA를 '해 볼만한' 목표로 삼아 이제는 국내 무대인 양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존경받는 기업인인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은 "국내외 전설적인 CEO들을 만나보면 훌륭한 점도 당연히 있으나 한편으로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동시에 느꼈다"며 "구름 위의 사람들이 아니니 '나도 하면 되겠구나'하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맞다. 실력차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기에 막상 부딪혀 보면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겨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상대가 안 되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싸워볼 생각을 안 하니) 상대할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우리 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내재돼있던 과거 세대와 달리 우리나라 '요즘 애들'은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삼성 핸드폰을 꺼내놓고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해외 팝스타가 아닌) 우리나라 가수 이름을 댄다. 한국어로 된 노래가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걸 당연하게 보고 자란 이들은 잠실 주경기장이 아닌, 뉴욕 매디슨 스퀘어나 런던 웸블리 구장에서의 공연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고 정진해 나갈 것이다. 열등감이 사라지면서 노는 물이 달라진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 없이 자라난 우리 아들 세대가 대한민국을 또 어떤 모습으로 바꿔놓을지 자못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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