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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만...

친일 잔재 논란에 '국민학교' 이어 '수학여행'마저 사라지나

by 늦깎이

언어는 사회적인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이기도 하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노랗고 길쭉한 과일을 '바나나'로 부르자"라는 식의, 사회적으로 정해진 룰(rule)을 지켜야 하지만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기억을 불러오는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사회적 언어와 개인적 언어가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언어와 개인적 언어가 따로 노는 어휘로 '국민학교'가 있다. 내가 학교를 다니고 졸업할 때만 해도 엄연히 국민학교를 다녔건만 이후에 '사회적'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뀌어 버렸다. 국민학교가 친일 잔재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 약속을 '초등학교'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초등학교란 어휘가 사회적으로 정착이 됐고 우리 아들은 엄연히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란 단어가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다. 이와 관련해선 예전에 가수 고(故) 신해철씨가 했던 얘기에 전적으로 동감(同感)한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이 나온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명하는 순간, 자신이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겪었던 경험, 친구들과의 추억이 사라져 버리고, 낯선 공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자신은 국민학교란 어휘의 적절성을 떠나 앞으로도 국민학교란 표현을 고집하겠다는 취지였다.


나 역시 국민학교 시절 얘기를 하는데 누군가 이를 초등학교로 바로잡으려 하면, 그 시절 짝꿍의 얼굴부터 집에 데려온 지 며칠 만에 죽어버린 병아리를 보고 오열했던 기억들이 '타노스'의 핑거 스냅과 함께 모래성이 부서지듯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미 내 개인의 삶 속에 자리 잡은 '국민학교'란 표현은 사회적 논란을 떠나 기억, 추억에 관한 문제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에 대고 일재의 잔재니, 정치적 올바름이니를 들이대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자 월권이다.




최근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또다시 친일 잔재를 띈 어휘에 대한 개정 작업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번엔 '수학여행(修學旅行)'도 그 대상에 포함됐다고 한다. 수학여행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 학생들을 일본에 견학시키던 행사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일제의 잔재(殘滓)란 주장이다.


혹시 '수학여행'을 '추억여행' 같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더라도 나는 앞으로도 당시 고등학교 친구들과 방구석에서 몰래 술 마시고 고스톱을 치며 보냈던 경주에서의 시간을 '수학여행'으로 부를 생각이다. 수학여행과 얽힌 개인적 경험과 추억을 빼앗아갈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아들이 훗날 학교에서 수학여행이 아닌 추억여행을 다녀온다고 하면 용돈을 쥐어주며 "추억여행 잘 다녀와라"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 애에겐 추억여행이란 말이 추억을 담아내는 새로운 그릇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어휘에 대한 개정은 분명 필요하다. 가령 단어 자체의 의미가 여성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는 미망인(직역하면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 같은 단어는 다른 말로 대체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수학여행'('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수학여행에 대한 예시문으로 '논산은 학교에 다닐 때 부여로 수학여행을 가느라고 와본 곳이다'라는 채만식의 '탁류' 한 구절을 제시하고 있다)처럼, 논란이 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어휘의 역사적 기원과 맥락을 따져봐야 하는 어휘까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지금에 와서 수학여행이란 단어를 언급할 때 학창 시절 추억 대신 일제 때의 치욕을 떠올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차라리 수학여행이란 표현을 놔두고, 일제 때 조선 학생들을 일본에 견학시키던 행사에서 유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지금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안 될까. 부끄러운 역사나 기억일수록 숨기기보다 겉으로 드러내야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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