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 보면 특정 노래를 묘사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재즈광으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는 재즈곡을 비롯해 다양한 팝 음악이 자주 언급된다. 제목을 바꿔달아 국내에서 소위 대박을 친 '상실의 시대'의 원제목이 비틀즈의 노래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이란 건 잘 알려진 얘기다.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단편 '드라이브 마이카'는 비틀즈의 '러버 소울'(Rubber Soul) 앨범 첫머리에 실린 곡 제목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또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제목으로 한 단편도 있는데, 이 작품 속엔 '예스터데이'를 일본 간사이 사투리로 번역해 부르는 주인공의 괴짜 친구가 등장한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예스터데이~'라고 부르는 대신 '어저께말여~' 하고 부르는 셈이다.
이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은 작가 개인의 음악적 취향 내지는 그 곡과 얽힌 은밀한 경험을 반영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그 곡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이 아니라면 독자 입장에선 작가가 그 노래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하필 그 희귀한 곡을 내가 잘 알고 있다면 궁금증은 더 커지게 된다.
판사 출신 추리소설가 도진기의 장편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를 읽다 그런 대목을 만났다. 이 소설은 1990년대 같은 대학을 다녔던 네 명의 복학생 동기들과 미모의 여성 후배 사이의 인연에서 비롯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소설에서 약 20년 전 일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90년대 노래가 흘러나온다.
복고풍 카페였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고진의 귀에 노랫말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너는 안녕을 말하며 나를 떠나려 하네. 예전에 우리....사랑했던 순간들을 넌 벌써 잊어버렸니... 비토의 '우리 이제는'이 LP 긁는 소리에 뒤섞였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386P
공일오비나 토이의 노래였다면 책장을 무심코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그룹도 아니고 '비토'(Veto)라니...
왕년에 어지간히 음악을 들었다 해도 이 그룹 이름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유희열의 '토이'처럼 일종의 '원맨 밴드'였던 비토는 작곡가인 기타리스트가 주축이 돼 객원 보컬이 참여하는 식의 소위 프로젝트 그룹이었다.
소설에 등장한 곡은 비토의 1집과 2집에 모두 실렸다. 1집에서 나름 히트한 곡이어서 2집에도 새로 편곡해 실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슈가맨'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거나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니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에 등장하는 90년대 회상 씬에서, 1990년대를 수놓았던 무수히 많은 히트곡 가운데 굳이 비토의 노래를 골랐다는 게 비토를 좀 아는 나로서는 무지하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노래를 기억하는 건 1997년에 발매된 비토의 2집 앨범 때문이다. 이 앨범에 객원보컬로 참여한 두 명 중 한 명이 내 친구다. 그 친구는 중학생 때 '본 조비(Bon Jovi)'에 심취해 팝 음악에 발을 들인 뒤 고등학교 때 동네 밴드 보컬을 거쳐 대학에 가서는 학내 록밴드 동아리의 보컬을 맡게 됐다. 그걸 계기로 일찌감치 가수로 밥 벌어먹겠다며 발 벗고 나섰다. 마침내 군대에 가기 직전인 대학교 2학년 때 나온, 자기 목소리가 실린 첫 앨범이 바로 비토의 2집이었다.
전체 수록곡의 절반 정도를 불렀는데, 소설에 소개된 '우리 이제는'도 그 친구가 노래했다. 어린 나이에 친구가 공식 가수가 돼 앨범까지 낸 게 하도 신기해, CD를 사다 정말 열심히 들어줬던 기억이 난다. 그랬기에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소설에 적힌 가사만 보고도 멜로디가 저절로 살아 나왔다. (그 앨범 중에선 나름 '우리 이제는'이 멜로디가 가장 귀에 잘 감기는 곡이다.)
혹시나 도진기 작가와 인연이 있나 싶어 친구에게 물었더니, 자기가 그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단다. 아마 기타리스트 형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게 아니겠냐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도진기 작가와 비토의 기타리스트가 같은 대학을 다녔고 얼추 나잇대도 비슷한 듯했다.
물론 작가가 무슨 연유에서든 과거에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노래를 극 중 상황과 어울린다고 생각해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선 확인이 안 되는지라 최근 내가 좋아하게 된 미스터리 작가와 비토와의 인연은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오랜만에 들춰낸 비토의 2집 CD 케이스 안엔 당시 한 스포츠신문에서 보고 오려뒀던 비토의 인터뷰 기사가 들어 있었다. 기사(記事)에서 이들은 그룹명 '비토'가 '세상의 모든 악을 거부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당시 음악 하는 사람들이 대중적 성공의 척도로 삼은 기준은 '가요톱10' 입성 정도였을 것 같다. 대한민국 가수가 요즘처럼 빌보드 차트에, 그것도 한국말로 된 노래로 차트 1위를 한다는 건 상상조차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와서 보니 이름 하나만큼은 호기롭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