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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문방구의 경쟁력

'요즘도 동네 문방구가 될까?' 학부모가 되고 깨달은 구멍가게의 매력

by 늦깎이

아이 등굣길에 그림일기장을 사서 보내라는 와이프 지시에 따라 아침에 문방구에 들렀다. 초등학교 길목에 위치한 곳이다. 평소보다 집에서 늦게 나온 터라 마음이 다급했다. 그림일기장이 어딨냐고 묻고 보니 주인아주머니가 앉아있는 계산대 오른쪽에 이미 그림일기장 뭉치가 바구니에 담겨 있는 게 보였다.


아이에게 "맘에 드는 걸로 골라 봐"라고 말하자, 이번엔 옆에 있던 주인아저씨가 "볼 것도 없어요. 남자 애들은 이걸로 하면 돼"라며 포켓몬스터가 표지에 그려진 그림일기장을 건네줬다. 그걸 받아 든 아들이 쓰윽 보더니 이내 주인아저씨의 결정에 수긍했다.


문방구에 들어서서 현금으로 계산하고 물건을 들고 나올 때까지 걸린 시간이 20초나 될까. 제품 주문에서 선정, 입금까지의 과정이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마트나 대형 문구점에 갔다면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하느라 최소 5분 이상 걸렸을지 모른다.


사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요즘도 문방구가 다 있네. 장사가 될까' 싶었는데 막상 실수요자가 되고 보니 동네 문방구가 건재할 수 있는 데엔 엄연한 시장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먼저 공급자 측면에서 보자면 학교 앞 문방구는 학교와의 인접성을 무기로 (문방구가 준비물과 관련해 학교 측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학부모들을 통해 정보를 얻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시에 제품의 수요를 예측해 재고를 확보할 수 있다. 제조업체들이 사전에 수요를 예측해 그에 맞춰 주문을 함으로써 제품의 재고를 최소화하듯 'Just In Time'이 가능한 것이다.


소비자인 학생(보다 정확히는 학부모)이 볼 때 동네 문방구는 준비물 구매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아껴주는 역할을 해준다.

언제부턴가 우리 일상 속에서 결정장애란 말이 자주 등장하게 된 건 우리에게 선택할 옵션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소비의 측면에서 보자면 유통업체가 대형화되고 그에 따라 제품의 품목 또한 크게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다. 더 많은 선택지는 소비자의 선택할 권리를 늘려준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 선택에 필요한 소비자의 시간과 비용 또한 증가시켰다. 그러니 종종 '차라리 누가 정해줬으면' 하고 스스로 선택을 포기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 있게 '남자 애들은 이걸로 하면 돼'라고 하는 문방구 사장님의 행동은 자칫 '강권(強勸)'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보단 결정의 수고를 덜어주는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자동차나 컴퓨터를 사는 것도 아니고 노트 한 권 사는데 무슨 대단한 비교, 검색이 필요하겠는가.


편의성 측면에서도 동네 문방구는 막강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온라인 유통업체들이 아무리 총알배송이니 새벽배송이니 하며 구매의 편의성을 자랑한다 해도 등굣길에 필요한 물건을 찾아가는 동네 문방구에 비할 바는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이니, 빅데이터니 하는 요즘 시대에도 학교 앞 '요충지'에 위치한 동네 문방구의 경쟁력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 학교로 올라가는 경사로 입구엔 항상 봉고차 한 대가 서있었다. 우리끼리 '땅딸이 아저씨네'라고 부르던 이동식 문방구였다. 봉고차에 물건을 쌓아놓고 팔다 보니 제품 수는 한정돼 있었지만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을 구하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 번은 제도기 세트를 미리 샀다가 얼마 뒤 땅딸이 아저씨네 가게에서 세트에 포함된 가짓수가 더 많은 제품을 더 싼 가격에 구비해 놓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로 학교 준비물은 따져볼 것도 없이 땅딸이 아저씨한테 믿고 맡겼다.


동네 문방구의 경쟁력에 대해 구구절절, 장황하게 떠들어댔지만 핵심은 물건을 파는 사람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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