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어김없이 허둥대며 집을 나섰다. 아들이 학교에서 매주 토요일 축구 수업을 한 지 어언 반년, 아침에 여유 있게 집을 나선 기억이 없다.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5분만 일찍 나올 걸'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지만 돌아서면 까먹는 루틴이 쳇바퀴를 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평소처럼 5분 늦게 나왔는데 1층 엘리베이터가 밖으로 나서는 순간 뭔가가 달랐다. 직감적으로 '토요일 오전 10시' 즈음의 기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아파트 1층 복도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봤다.
'시계가 고장 났나?'
오른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시간을 확인해봤다. 역시나, 시간은 오전 9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평소처럼' 5분 늦게 나온 게 아니라, '평소보다' 무려 50분을 '일찍' 나온 것이었다.
순간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졸지에 시간을 번 셈 쳤다. 그리고 오늘은 적어도 '늦지 않게 데려다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모처럼 음악을 틀어놓고 여유롭게 신문을 읽다 보니 금세 시간이 흘러갔다.
'오늘은 늦지 않겠지' 생각하며 축구 시작 10분 전에 집을 나서려고 봤더니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
아들 녀석왈, 좀 전에 벗어놓은 축구 양말 한 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양말도 아니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처럼 얇은 것도 아니고 등산양말처럼 두툼한, 더구나 다른 색도 아닌 '새빨간'색의 축구 양말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방방이 뒤지고 소파 밑도 살펴보았건만 어른 팔뚝만 한 빨간색 축구 양말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소파 쿠션 밑에 웅크리고 있는 빨간 양말을 발견했다. 부랴부랴 집을 나섰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5분을 늦게 나오고야 말았다.
어쩌다 50분을 미리 나올 순 있어도 평소보다 5분을 앞당기는 건 이리도 힘든 모양이다.
사실 토요일 아침마다 5분 일찍 나오지 못해 1~2분씩 늦는 건 늦잠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게을러서 그런 건 아니란 얘기다.
돌이켜보면 여유 있게 일찍 일어나더라도 나갈 시간에 임박해서야 아이를 깨우고 아침을 챙겨 먹느라 시간에 쫓기곤 했다. 정규 학교 수업도 아니고 토요일에 하는 과외활동이니 그저 '시간 맞춰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해서 꾸물거렸던 것이다. 결국 '성의'의 문제였던 셈이다.
이런 나의 성의 없음은 토요일 아침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걸 '숙제'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시작됐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학교까지 함께 가는) '과정'은 아랑곳 않고 (학교에 데려다 놓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됐다. 좀 더 일찍 나와 여유롭게 데려다주는 건 (마땅히 다른 할 일도 없는데도) 시간을 허비하는 '비효율'처럼 느껴졌다.
그 결과가 (그조차 제대로 안 지켜졌지만) 그저 늦지 않게만 데려다 주자는 '효율성' 추구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런 행동은 마음 떠난 애인이나 만나기 싫은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태가 비슷하다 해서 금쪽같은 우리 아들에 대한 나의 애정이 식었을 리 만무하다. 원인은 '다른 데'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랬다. 처음엔 와이프와 번갈아 축구에 데려다줬다. 공평했다.
그런데 와이프가 한두 번씩 자기 차례를 미루었고 어느 순간 돌아보니 이 일을 나 혼자 오롯이 전담하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나 설명도 없이, 시나브로 그렇게 굳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내심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 나만 데려다줘야 하나. 다른 날도 아닌 토요일 아침에...'
결국 토요일 아침마다 뭉그적거리다 제때 집을 나서지 않은 것은 공정하지 않은 육아에 대해 와이프를 겨냥한 무의식적인 무언의 항변이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한마디로 억울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