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과학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아들의 손에 투명 플라스틱 상자가 들려 있었다. 바닥에 깔린 축축한 흙더미 속엔 엄지손가락만 한 커다란 달팽이 두 마리가 숨어 있었다. 외래종이라 덩치가 크다나.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다.
'그래, 거북이나 물고기보다는 낫겠지'
아들은 눈앞의 즐거움만 좇으면 그만이지만 아빠는 뒤치다꺼리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먹이는 뭘 줘야 하나' '흙도 갈아줘야 하나'. 녀석이 받아온 한 장 짜리 달팽이 키우기 지침서엔 뭘 먹일지, 청소는 어떻게 할지는 물론, 가끔 어떤 식으로 목욕을 시켜줘야 할지까지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2주에 한 번은 흙을 갈아주라는 대목에서 뒷골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론 아이가 '생물(生物)'을 받아올 때마다 드는 부담감이 찾아왔다.
'얘네는 언제까지 살아 있으려나'
서너 달쯤 전이었다. 그날도 과학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들 손엔 조그만 플라스틱 박스가 들려 있었다. 상자 안엔 반쯤 물이 채워져 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투명한 빛깔의 물고기 한 마리가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길이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 송사리를 닮았다. 이름은 '구피'라 했다. 전용 먹이와 이따금씩 공기를 정화하는 데 쓰는 거라며 플라스틱 스포이드도 챙겨 왔다.
이미 우리집엔 우리 세 식구 외에도 거북이 두 마리가 함께 살고 있었다. 거북이 이름도 지어줬다. 작은놈은 '어니부기'(포켓몬 캐릭터라고 한다), 큰 놈은 '거북왕'이다. 처음엔 크기가 엇비슷했는데, 여름에 여행 가느라 본가에 잠시 맡겨놓은 사이 눈에 띄게 격차가 벌어졌다. 한 마리가 유독 빨리 자란 탓에, 와이프와 나는 '혹시 그새 한 마리가 죽어서 엄니가 새로 사다 놓으신 게 아닌가'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처음엔 어른 숟가락만 하던 녀석들이 훌쩍 자라면서 물도 금세 더러워지고 관리하기가 까다로워졌다. 자기가 책임질 것처럼 굴던 아들은 언제부턴가 밥 주는 것도 까먹고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면서도 농담 삼아 '이제 그만 한강에 풀어주자'고 하면 울상을 넘어 울음을 터뜨렸다.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처음이라 그런지 구피는 살뜰하게 챙겼다. 먹이를 주고 스포이드로 공기를 주입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기가 엄마라도 된 양 잠시 동안 뿌듯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게 2주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스포이드로 물을 정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내가 물을 갈아주기로 했다. 구피를 담은 통을 세면대로 가져갔다. 담겨있던 물을 반쯤 붓고 수돗물을 채우고를 몇 번 반복하던 찰나, 다시 물을 따라내는데 구피가 딸려 나왔다. 마침 세면대 구멍도 막아놓지 않았다. 구멍은 멸치만 한 구피가 통과하기에 충분했고, 구피는 그렇게 하수구로 떠내려가 버렸다.
비극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뒷감당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구피가 떠내려간 사실을 전하면서 "하수구가 강이랑 바다로 연결됐으니까 바다로 갔을 거야"라고 나 스스로도 믿기 힘든 얘기를 해버렸다. '그래, 언젠가 죽을 텐데 나중에 죽은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단 나을지 몰라'하고 자위하면서.
비보(悲報)를 전해 들은 아들은 '구피를 살려내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책임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와이프는 멀찍이 서서 나의 부주의함을 탓했다. 오열하는 아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 내가 딱 저만 했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8살이었던 나는 생애 두 번째로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 2마리를 사다 라면 박스에서 열심히 키우고 있었다. 1년 전 난생처음 병아리를 키웠을 때 한 달여쯤 길러봤던 지라 이번엔 닭이 될 때까지 키워보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왠지 느낌도 좋았다.
병아리들을 데려온 지 1주일쯤 지났을 무렵. 여느 때처럼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는엄니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근심스러워 보였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난감해하는 엄니의 모습에서 어린 나이에도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얼른 병아리들한테로 달려갔다. 분명 내가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들이었다. 집에 오면 삐약삐약 소리로 나를 맞아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삐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마, 아닐 거야...'
이미 1년 전에 한 차례 병아리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이후로도 학기초면 연례행사처럼 병아리를 사들고 왔기에 돌이켜 보면 병아리와의 이별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유독 그 날 신문지 깔린 라면박스 바닥에 "차디차게 식어있었"던 두 녀석 모습만큼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았다. 너무 급작스러웠기 때문이리라.
사실 내 책임이었다. 그날 집에 놀러 온 친구들과 병아리를 목욕시킨다며 샤워기로 물을 뿌려대고는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달리 책임을 미룰 데도 없었기에 그리 서럽게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한바탕 울고 나서는 금세 잊었던 것 같다. 그맘때 아이들이 그렇듯 눈앞에서 사라지면 금세 기억에서도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우리 아들도 그럴 줄 알았다.물고기랑 같이 지낸 기간이 기껏 해봐야 2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구피와의 추억이 짧지만 굵게 인상에 남았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고 몇 주가 지나고서 녀석의 그림일기장에서 우연히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을 마주하게 됐기 때문이다.
"구피야 너는 바다에서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지나치게 감정이입한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들 일기장에 삐뚤빼뚤 적힌 '잘 지내고 있니'란 구절에서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모습이 연상됐다. 돌아오지 못할 연인에게 "잘 지내고 있나요(오겡끼데스까)"라고 목놓아 외치던 그 장면 말이다. '웃프다'는 게 이럴 때 딱 들어맞는 표현인 듯싶다.
우리 땐 학기 초면 어김없이 학교 앞에 병아리 장수가 등장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해 보이는 놈은 100원, 튼실해 보이는 놈은 200원을 받고 팔았다. 일부러 골골한 놈들만 내다 파는 것이란 얘기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갓 태어난 병아리들이 어미도 없이 아파트 라면상자 안에 갇혀 지내면서 오래 살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양계장도 없는 아파트 곳곳에서 삐약대던 수많은 '얄리'(※)들은 애초부터 길어야 한 달 안팎을 함께 살 시한부 운명이었던 거다.
한동안 우리집을 거쳐간 여러얄리들을 생각할 때면 자연히 그날의 사건이 떠올랐다. 기억 속 카메라 앵글은 줄곧 서럽게 울고 있던 어린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어느덧 내가 아이를 키우고 그 뒤를 불안하게 졸졸 좇다 보니 그 날의 기억이 다소 다른 방식으로 편집되기 시작했다. 기억 속 카메라 앵글은 이번엔 그날 서럽게 울고 있던 내 모습을 지나 그 뒤에서 나를 지켜보던 부모님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흐릿한 화면 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지만 순간의 상처가 혹시라도 흉터로 남지는 않을까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그 사건 이후로도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몇 차례 더 병아리를 사들고 왔고, 그때마다 부모님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새 식구를 맞았던 것 같다. 그 표정 속에는 한편으론 결국 본인들이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데 대한 부담감이, 다른 한편으론 '저거 오래 못 살 텐데, 쟤가 나중에 또 상처 받으면 어쩌려나' 하는 근심이 반반씩 담겨있었으리라.
아이는 현재를 산다. 그렇다 보니 작년에 겪었던 슬픔은 아랑곳 않고 올해도 어김없이 병아리를 사들고 온다.
어른은 미래를 산다. 그렇다 보니 아이가 들고 온 병아리나 물고기를 볼 때면 미리부터 가슴이 철렁한다.
아이는 행복한데 부모는 근심한다. 아이는 그런 부모의 근심을 먹고 자란다. 근심이 충분히 쌓일 때쯤 아이가 어른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 '얄리'는 고(故) 가수 신해철씨가 이끌었던 밴드 '넥스트' 1집에 실린 노래 '날아라 병아리'에 등장하는 주인공 병아리의 이름입니다. 신해철씨가 어릴 적 육교 위에서 사서 기르다 1974년 봄에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