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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Jan 18. 2023

<더 글로리> 동은은 결국 '평범한 삶'을 살게 될까

O.S.T. 'Until the end'에 드러난 동은의 속마음


Stilll one thing puzzles me inside
Why can't I live a normal life?
No matter how hard I try to change myself
I know this much is true

여전히 내 안에서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왜 나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걸까?
아무리 나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 봐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아

'Until the End' -Kelley McRae
from <The Glory> OST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The Glory)>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 건 드라마 첫 장면에 배경음악으로 등장하는 음악 때문이다. 안개 낀 세명시(드라마 속 가상도시)에 주인공 동은(송혜교)이 차를 몰고 진입할 때 나오는 'Until the End'켈리 맥레이(Kelley McRae)란 미국 가수가 부른 노래다.


처음 들어보는 외국 가수의 노래가 드라마와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단순히 분위기에 맞는 기존 곡을 찾아다 쓴 게 아닌 듯싶었다. 주인공 동은이 속내를 털어놓는 독백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노래의 작사(이윤찬), 작곡가(박성일)는 우리나라 음악가들이었다. 드라마를 위해 새로 쓴 노래였던 것이다.


놀라운 건 켈리 맥레이란 가수가 무명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녀의 유튜브에 들어가 보니 <더 글로리>에 삽입된 이번 노래 관련 영상들만 10만회 전후를 기록했을 뿐, 대부분은 수년 전에 올라온 영상도 조횟수가 수 백회에 불과했다. 그녀의 SNS를 통해 좀 더 찾아보니 소외된 계층(underserved)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등 지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우리 식으로 인디 가수인 듯했다.


가수 스스로도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채널을 찾아온 수많은 팬들의 반응에 놀랍고 감격스러워하는 듯했다. 어떤 사연이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작부터 완벽에 가까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타국의 초야에 묻혀있던 무명가수를 발굴해 소리를 완성해 낸 제작진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학교 폭력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를 관통하는 감정은 '공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 동은에게 강하게 감정이입하며 그녀의 복수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끔찍한 행동에 공분하기 때문이다. 온몸을 고데기로 지지고 학대하는 가해자들의 잔학성은 성인이 된 동은의 몸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가해의 흔적이 극 중간중간 시청자들에게 계속 보여짐으로써 시청자들의 복수심을 자극한다.


동은의 상처 못지않게 시청자들의 공분을 일으키는 요인은 가해자인 연진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점이다. '권선징악'은커녕, 어릴 적 공언한 대로 번듯한 직업을 얻고 능력 있는 남편과 결혼해 토끼 같은 자식을 낳고 잘 살고 있다. 도무지 실패나 시련 따위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이처럼 현실의 법과 제도로는 단죄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가해자를 지켜보며 우리는 동은의 사적(私的) 복수에 공감하게 된다. 동은의 복수는 "내 꿈은 너야, 연진아"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곧장 몸통인 연진에게로 향해간다. 우리네 현실에서처럼 몸통은 놔두고 꼬리 자르기 식 흐지부지 결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진의 조력자 역할을 했던 명우나 혜정 같은 꼬리를 이용해 몸통을 옥죄는 방식으로 통쾌하게 전진한다.


드라마 전반부를 몰아보며 동은을 응원하는 동안 '공분'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렇게 축적된 감정을 안고 다음 편 공개 때까지 기다리라니. 일부 시청자들이 "<더 글로리> 지금 보지 마세요"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최근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대상으로 과거 학교 폭력을 고발하는 사례를 자주 접하게 된다. 모든 폭로가 정당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이들이 과거의 문제를 다시 꺼내든  예전에도 강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이 여전히 연진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데 대해 분노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내 상황이 불만스럽고 괴로울수록 분노의 크기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과거의 가해자가 현재의 나보다 못한 상황이라고 느껴지면 어떨까.

김지연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에 실린 단편 '굴 드라이브'는 오랜만에 고향에서 우연히 만난 학창 시절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미묘한 감정을 다룬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서울에서 생활해온 주인공은 일자리 소개를 핑계로 선 자리를 주선하려는 삼촌의 꼬임에 넘어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다. 배달 일을 도우러 삼촌의 굴 공장에 갔다 우연히 고등학생 때 반장이었던 동창을 만난다. '저녁에 맥주나 한잔 하자'제안을 얼떨결에 받아들이는 바람에 반장의 집까지 찾아간 주인공은 뜻밖의 고백(?)을 듣는다. 학창 시절 너를 엄청 싫어했는데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 학창 시절에도 반장을 부러워했었다. 호쾌한 성격에 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늘 상위권이었던 성적, 원어민 선생도 칭찬했던 영어 발음, 백 미터 달리기에서 매번 일등을 하던 것......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듯했다... 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는 반장을 싫어했다. 반장이 나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굴 드라이브' 58P)


학창 시절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의 부러움을 샀던 반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결혼했다 지난해 이혼을 했고, 전 남편은 다른 여자와 옆 동네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주인공 삼촌이 운영하는 굴 공장에서 사무 일을 봐주며 혼자 초등학교에 입학할 딸을 키우고 있었다. 한때 반장을 부러워했던 이유들은 모두 세월에 실려 사라지고 눈 앞에 남은 건 그녀가 짊어진 힘겨운 삶의 무게 뿐인 듯했다.


반장이 예전에 왜 주인공을 싫어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학창 시절 반장이 주도해 주인공을 따돌리는 일종의 '왕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글로리>처럼 폭력이 동반되진 않았지만 당시의 기억은 여전히 주인공에게 상처로 남았다. 희망을 담아 지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냐'는 반장의 말에 주인공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어릴 때에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미움만 받았던 기억은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았다. 상처가 됐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 해줄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싫어해."
어쩌면 나도 그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굴 드라이브' 68P)


뜻밖의 사과와 예상밖 거절로 어색하게 헤어진 두 사람.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주인공은 문득 반장의 집에서 먹었던 '굴 무침'이 생각난다. 이번엔 자신이 먼저 카톡으로 요리법을 물어본다. 반장은 처음엔 사과를 안 받아준 데 대한 앙금이 남은 듯, 요리법이 적힌 블로그만 달랑 캡처해 보내준다. 하지만 한참 뒤에 메시지를 보내 "또 먹으러 와. 용서는 안 해줘도 되니까 그냥 와"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듯 "나는 반장을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그제야 고향을 좀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한다.


학창 시절 반장은 강자이자 가해자였지만 성인이 되어 만난 두 사람 사이에 과거와 같은 '우열' 남아있지 않았다. 특히 왕따에 대한 기억은 피해자인 주인공뿐 아니라 가해자인 반장에게도 성인이 되어서까지 '앙금'으로 남아있었다.

이렇게 양쪽이 동등한 입장에서 과거의 일을 터놓고 얘기하자 굳이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피해자의 마음은 어느 정도 치유된 듯한 모습이다.



동은은 만약 가해자인 연진이 성인이 되어 실패하고 불행을 겪는 모습을 보게 됐더라도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을 계속 이어갔을까.

물론, 드라마에서 연진이 동은에게 가한 폭력은 용서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도무지 용서를 해줄 만한 일말의 접점마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은으로선 복수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복수를 위해 달려왔지만 어쩌면 동은이 진정으로 원했던 건 <Until the End>의 노래 가사처럼  그저 '평범한 삶(normal life)'이었는지 모른다.


They taught me how to live again
I'll never fall into despair
I just want to live a normal life
from now on till the end

그들은 내가 어떻게 다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줬어
난 절대 다시 절망에 빠지진 않을 거야
난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지금부터 쭈욱 끝까지

'Until the End' -Kelley McRae
from <The Glory> OST


평범한 삶이란 남에게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 삶이다. 권선징악, 인과응보 같은 진부한 말들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실현이 되는 삶이다. 하지만 가해자인 연진에게는 그런 평범한 삶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현실의 법과 제도가 이를 제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사자인 동은이 직접 벌을 주는 사적 복수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학창 시절의 동은과 지금의 동은은 다르다. 동은이 어릴 적 가장 힘들었던 순간엔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지만, 지금의 동은에겐 기꺼이 그를 도와주려는 우군들이 있다. 위 노래 가사 속 'They'는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 동은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망나니' 의사 여정과 다음 생엔 비밀요원이 되길 꿈꾸는 현남, 과거에 도움을 주지 못해 마음의 빚을 가졌던 양호선생님처럼 동은을 응원하는 사람들.


이들이 곁에 있기에 동은이 하는 복수는 단순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일차원적인 방식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부디 동은이 연진과 함께 파멸하는 대신, 자신곁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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