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과 <완벽의 추구> 함께 읽기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같은 경로를 따라 흐르므로 고통스러운 감정을 차단해버리면 간접적으로 즐거운 감정까지 차단된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통스러운 감정, 행복한 감정 모두 중요하다. 그 감정들 하나하나가 현재 나의 상태를 명확히 알려준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감정을 감추고 싶어 한다.
어릴 때 부모님은 나에게 선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늘 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했고, 잘못된 행동에는 대가가 따랐다. 더구나, 종교적 신앙심이 깊었던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은 가볍고 경솔한 것을 싫어했다. 아직 초등학생인 내가 점잖고 진지하길 원하셨다. (점잖다는 말을 풀어보면 젊지 않다는 뜻인데, 왜 그런 말을 어린아이에게 주입식으로 강요했는지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안 그래도 내성적이었던 나는 그렇게 말을 최소화하도록 훈련되었다. 힘들거나 슬픈 내 감정을 전달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 시대의 남자, 특히나 장남에겐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 감정을 쌓아 둘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성에 대한 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신체의 변화와 더불어 이성에 대한 갈망도 커져갔다. 이런 감정들은 더욱 드러내기 어려웠고 표현할 줄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난 신앙이 만든 세상과 또래 친구들과 살아가는 세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종교 안에선 착하고 순종적인 청소년이 되어야 했고, 밖에선 친구들과 같은 은어와 욕설을 써가면 그들 속에 어울려야 했다. 신이 창조한 세상이 이렇게 모순되고, 그를 닮아 창조된 인간의 모습이 이렇게 불량할 줄은 미처 몰랐다.
내가 느끼는 감정적 혼란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냥 주변 상황에 맞게 필요한 감정을 선택적으로 느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부모님의 간섭이 커지면 쌓였던 감정을 터뜨려 버렸다. 부모님은 왜 나의 감정이 격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내가 직면한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 너무 답답했다. 선한 삶에 대한 의무감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싫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감정을 감춘 채 친절하려 애썼다. 내가 이룬 것에 대한 뿌듯한 감정도 겸손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속으로 삭여야 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하는데 서툴렀고 그것으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는 더 힘들어져 갔다.
이런 의무감은 때때로 완벽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완벽의 추구>는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그 아래에는 나 자신과 주변 환경을 모두 통제해야 한다는 의무감이기도 하다. 삶의 모든 면을 통제하지 않으면 어딘가 빈틈이 생기고 그 빈틈으로 인해 내 삶이 망가진다고 느낀다. 앞 날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왜 완벽해야 한다고 믿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건 자기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적인 생각으로 힘들었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내가 미리 생각한 대로 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감이 컸다. 어릴 적 좋지 않은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완벽함으로 추구함으로써 완전함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또는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과도 유사하다. 사실 누구에게나 계획한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일도 흔치 않다. 상황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판단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에겐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 전환 연습이 도움이 되었다. 마치 영혼이 내 몸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제삼자의 관점이 되어 그 상황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연습이 반복되면서 나 자신을 좀 더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고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게 되었다. 어떤 경우는 계획하지 않은 일이 발생해도 의외로 잘 헤쳐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계획과 실행 과정에서 마냥 팽팽하기만 했던 마음의 긴장감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 집중하는 거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드 니버는 자신의 기도문에서 이렇게 썼다.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행복의 기원>에서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행복감을 느끼는 방식이 또는 그와 관련된 유전자가 자연선택에 의해 살아남은 것이다.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이, 외로울 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얘기하는 것이 생존하는 방법이었고 그럴 때마다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생존도 중요하지만 세대를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기에 이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수록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인류 문명이 발달하면서 보다 고상한 삶의 목표가 필요했고 그걸 자아실현이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생존을 위한 활동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성이나 창의성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멋진 마음을 갖고 그것을 행동을 옮길 줄 아는 사람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이성에게 더 큰 매력적으로 보인다.
고통이라는 감정도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측면에서 행복감과 동일하다. 몸에 작은 상처만 생겨도 우리는 아픔을 느낀다. 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큰 상처가 되고 목숨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몸의 이상에서 오기도 하지만, 이별이나 외로움, 배신감도 우릴 고통스럽게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느끼는 뇌세포는 신체적 고통을 느끼는 뇌세포와 동일하다. 결국 우리의 뇌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과정에서 배운 최적의 생존 방법에 대한 기록이다.
문제는 행복감이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배 부르게 먹어도 하루면 배가 고파지고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도 1년 정도 지나면 행복감이 주변 사람들과 비슷해진다. 오히려 과거의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어지간한 일에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결국 소확행이라 부르는 작은 행복을 이어가는 것이 잘 살아가는 방법일까?
그런데, 집단주의 문화가 행복감을 낮추고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느낌이 행복감을 높인다는 점은 의아하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쓸수록 무리에서 생존 가능성을 더 높였을 것인데 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성향이 살아남은 것일까? 짐작해보자면 그건 자신을 드러내야 자신의 고유한 강점을 알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 아닐까?
이 시대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졌던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을 느낄까 우려되기도 한다. 어는 쪽이든 결국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자신 만의 정의 없이는 의무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완벽주의로 이어진다.
완벽주의는 사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전제로 한다. SNS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이 타인에게 드러난다.(대부분은 자랑하듯 올리는 것이지만) 그리고 드러난 내 삶과 그렇지 않은 내 삶에는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SNS에 더 멋진 사진과 영상을 올리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삶이 내 삶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완벽주의는 삶을 팽팽하게 만들고 팽팽하게 긴장된 몸과 마음은 행복감을 느낄 겨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쫓기지 않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맛난 음식도 멋진 연인도 쫓기듯 찾아다니는 건 그저 생존의 조건을 따라가는 거다. 쫓기지 않는다면 동물적 본능을 따라가지 않고 사회가 만든 허상을 따르지도 않으리라. 사실 그런 여유와 편안함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특성에 맞춰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방법과 지혜가 있더라도 자신과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찾아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