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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치아 Apr 08. 2021

[작문연습] 판

모든 폰들의 '퀴닝'을 위하여

내가 기억하는 한, 인생에서 처음으로 극장에서 봤던 영화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었을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마법수업, 퀴디치 등등 후보군이 너무 많다고 누구나 힘들어하겠지만, 나는 늘 확고한 ‘원픽’이 있었다. 바로 론의 체스 대결 장면이다. 하지만 나는 웅장한 흑백의 체스판 위에 무시무시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기사들의 모습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나를 사로잡은 건 자신보다 몇 배는 큰 체스 말들을 진두지휘하는 론이었다. 돈이 없어 초콜릿도 못 사 먹는, 마법을 잘하지도 못해 무시당하는 그런 의기소침한 꼬마였던 론은 체스판 위에서만큼은 늠름하고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친구들 모두 가지고 있던 그 흔한 게임기 하나 갖지 못해 어깨너머로 구경만 했던 내가 론을 동경하게 된 건 아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론을 따라서 자연스레 체스에 입문했다. 나도 론처럼 체스판에서 당당하게 서고 싶었던 마음이 컸나 보다. 단순히 론이 멋있어 보여서 시작했던 체스는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게임이었다. 체스에는 모양도 다르고 기능도 다른 기물 사이에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 예컨대, 어느 방향이든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는 ‘퀸’과 기본적으로 앞으로 한 칸씩만 움직일 수 있는 ‘폰’이 있다. 그래서 폰은 말 그대로 전략을 위한 소모품쯤으로 여겨지지만, 퀸은 게임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기물이다. 이 때문에 체스를 가끔 ‘퀸의 게임’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소모품 같은 폰은 상대편 진영 끝에 도달하면 아무 말로 변신할 수 있다. 폰보다 높은 ‘룩’, ‘나이트’ 또는 ‘비숍’으로도 바꿀 수 있지만 보통 제일 강력한 퀸을 선택하기 때문에 이 규칙을 ‘퀴닝(queening)’이라고 부른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기물이 게임체인저가 되는 것이다.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폰이지만 워낙 소모적인 역할을 하기에 내로라하는 고수들마저도 이를 간과해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반전의 규칙이 보장되고 지켜지는 곳. 체스판은 그렇게 꿈과 희망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흔히 체스를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며 겪는 전쟁들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체스의 기물들은 내가 세상의 시련에 맞서 싸우기 위한 수단이고, 그 수단을 잘 버무려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해나가는 체스가 곧 인생이라는 뜻이겠다. 하지만 체스와 달리 인생이라는 게임판에는 ‘퀴닝’의 규칙은 보장되지 않는 듯하다. 폰에서 퀸은 바라지도 않으니 나이트만이라도 되게 해달라며 트윈타워 로비에 머무는 청소노동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미 두 달이 넘었음에도 게임의 규칙은 지켜지지 않아 이들은 아직도 폰으로 살아간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폰들인 청년들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을 감당하기 위해 원치 않는 빚까지 내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위태롭고 일시적인 퀴닝으로 보일 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폰들이 가슴 속에 퀴닝을 품고 살아가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현실은 결코 체스판처럼 고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론에 눈길이 갔던 것은 바로 그가 보잘것없는 폰에서 판을 흔드는 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퀴닝은 어디까지나 이를 가능케 하는 규칙이 지켜지고 보장될 때만 가능하다. 물론, 체스에서 모든 폰이 다 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퀴닝 자체가 정말 어려운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퀸이 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누구나 퀸이 될 수 있고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백배 낫지 않을까. 먹고사니즘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요즘이지만, 팍팍한 세상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마저 앗아가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조앤 롤링이 체스 장면을 굳이 넣었던 이유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퀴닝을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세상이라는 체스판에도 폰이 퀸이 되는, 약자가 약자로만 남게 되지 않는 최소한의 기회가 주어지고 지켜지길 바라는 게 너무나 큰 욕심은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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