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미'라는 배우에 관심이 생겨 최근 [이태원 클라쓰]를 뒤늦게 정주행 했다. 이태원에서 작은 가게로 장사를 시작한 어느 한 청년이 불굴의 의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이 시대 현실을 고려해 본다면 어쩌면 판타지에 가까운 비현실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기에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김다미라는 배우의 소시오패스 연기가 궁금해 열어봤다.
결과적으로 김다미 배우의 연기는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놀라운 점이 배우의 연기에만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초반 극단적으로 펼쳐지는 사건 전개에 빨려 들어가는 몰입감, '박새로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주인공(박서준 役)이 가진 강렬하고 굳은 캐릭터의 매력, 무엇보다 힘이 지배하는 현실에 체념하며 살아가는 소시민에게 잠자고 있던 정의감과 분노를 뜨겁게 달구게 했던 거친 에너지의 이야기와 연출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놀랍게도 1회부터 눈물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눈물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매회 계속되었다. 대체 이 눈물의 출처는 어디일까, 무엇이 이토록 마음을 뜨겁게 하고 눈물을 토해내도록 하는걸까, 라는 생각이 골똘히 들었을 정도로 이 드라마에 깊게 빠져들었다.
초반 몰입감이 엄청난 드라마, 가슴이 뜨거워진다.
내가 흘렸던 눈물의 출처란 어찌 보면 뻔한 곳에 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지금의 세상에 우리가 가진 원한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속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기에 정의감이란 현실을 살아나가는덴 거추장스러운 치기이자 세련되지 못한 자기 연민일 뿐이라 다독이며 마음 한 켠 어딘가에 밀어둘 수밖에 없었던, 잊히기를 강요당한 진실의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몸 밖으로 뚫고 나온 감정의 증거일 것이다. 그 눈물의 실체란. 보는 이를 뜨겁게 달구었던 드라마 속 대사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소신에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자, 여기까지는 이 드라마를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흥이자, 이 드라마에 빨려 들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1회, 2회로부터 발단이 된 박새로이가 겪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당한 처사와 몰락, 그런 부당함을 손쉽게 덮어씌우는 돈과 힘의 몰인정함과 뻔뻔함, 그리고 밑바닥으로부터 타협하지 않고 천천히 힘겹게 나아가는 복수의 시간들, 복수의 방법으로 채택되는 정당한 수단과 그에 따른 역경의 연속, 주인공을 따르는 주변 인물들을 결속시켜 주는 인간애와 휴머니즘, 여기에 양념처럼 버무려지는 삼각관계와 로맨스의 줄타기. 그야말로 권선징악과 로맨스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따르는 이야기 구조다. (나열하고 보니 요즘 화제인 드라마 [더 글로리]와 흡사하다. 아무래도 요즘 드라마에 빨려 들게 하는 주요 정서는 복수와 분노일까)
분노와 복수의 이야기는 요즘 드라마의 주요 소재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와 다른 차별점, 그리고 꽤나 재미있게 발견되는 특이점은 그 '권선징악'이 천편일률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권선징악의 스토리가 보는 이로 하여금 순탄하고 폭발력 있게 통쾌함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려면 '선이 악을 응징한다'는 명제는 절대적이어야 하며, 여기서 대전제는 '선은 순수하게 선해야 하며, 악은 순수하게 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악을 응징해야 하는 선이 관객들이 동의할 수 없는 악랄한 방법을 동원한다거나 혹은 마땅히 응징받아야 하는 악이 가끔씩 선한 인간애로 보는 이를 감동시킨다거나 하는 행위가 발생되면 사람들은 인물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혼란스럽게 되고 충분히 감정이입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인물에 거리를 두게 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선으로 드라마를 보게 된다면, 현실성(reality)이야 높아질진 모르겠지만 재미와 감동은 크게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드라마는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해야 하고 선은 선끼리 악은 악끼리 뭉쳐야 하며(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노선을 변경하더라도 그 구분은 뚜렷해야 한다), 선은 선의 방법으로 악은 악의 방법으로 행위를 이끌고 선은 악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은 선을 짓밟기 위해 자신의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 한다.
문제는 이 드라마가 전체적으로는 권선징악의 큰 틀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어가 보면 선과 악의 대결 구도가 튼튼하지 않고 가끔은 삐걱대며 때론 이중의 인물, 행위, 사건이 종종 등장함으로써 혼란을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이 종종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쾌함과 후련함이라는 복수 드라마의 카타르시스를 충분히, 아니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폭발시킨다는 점이다.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삐걱대고 있으며 어디로부터 해소가 되고 있는 것일까. 결국 이 드라마가 우리를 뜨겁게 하는 건 어느 지점인 것인가? 분명한 건 그것이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드라마는 선과 악의 대결인가?
서론이 길었다. 자, 그렇다면 조금씩 뜯어가며 살펴보자. 우선 선과 악의 구도로 이 드라마를 본다면 단연 '단밤'과 '장가'로 구분될 수 있다. 이태원의 작은 포차와 거대 기업이라는 규모 면에서도, 장사의 본질을 사람과 돈으로 보는 가치관의 차이 면에서도, 박새로이와 장대희의 개인적 원한관계의 면에서도,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하게 선과 악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때 모든 선의 정점, 즉 '절대선'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박새로이와 모든 악의 정점 '절대악'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장대희가 대칭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권선징악 드라마의 인물설정 조건을 충실히 충족한다. 하지만 조연급 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본다면 혼선이 발생한다.
우선 절대선과 러브라인에 있는 두 인물, 조이서(김다미 役)와 오수아(권나라 役)를 살펴보면, 절대선의 편에 선 조이서는 인간애와 공감력을 결여한 소시오패스다. 대개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와 함께 타인을 가해하거나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반사회적 정서장애를 갖는 인물로서 드라마와 영화에서 '악'의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선의 편, 즉 '단밤'이라는 공동운명체에, 그것도 핵심적인 인물로 소속된다. 거꾸로 오수아는 보육원 태생에 박새로이와 역경을 같이 겪은 정서적 연대감을 가진 인물이지만 악의 축인 '장가'에 소속되어 활약하는 핵심인물로 부각된다. 이 두 인물은 드라마를 선과 악의 대결로 가르기를 거부하며 그 경계 사이를 오가며 불편하고 위태롭게 서성이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드라마 중반부까지 이 두 인물에 대해 시청자가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어떻게 감정이입해야 할지 난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물론 이 두 인물은 이러한 점으로 인해 드라마에 긴장감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고, 특히 지금 시대 착함의 무기력과 답답함을 해소해 주는 역할의 기능도 한다. 가령 조이서라는 인물은 소시오패스이기에 무력한 선을 대신해 주저 없이 악과 맞서는 힘 있는 자(선도 악도 아닌)로 통렬함을 발휘하기도 하며, 혹은 이득 없이 착한 자(호구)가 되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고 이득을 챙기는 현실주의자(역시 선도 악도 아닌)의 역할로 우리 소시민의 모습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각자 속해있는 영역, 즉 이들이 탄 배는 각각 절대선의 '단밤호'이며 절대악의 '장가호'라는 점에서 결국 이들은 어떤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직면해야만 하는 경계에 선 자들이다. 그리고 또, 이런 경계를 오가는 모호함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장근수(김동희 役)다. 선과 악의 구도로 본다면 이 친구는 절대선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인물에서 절대악에 절대적으로 편입되는 이상한 행보를 보이다가 종국에 절대선에게 잘못을 시인하는 개과천선의 인물로 등장하는 듯 보이지만 그 동기가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사소하고 찌질한데다가 선에서 악화한 인물이라고 하기엔(대개 그런 인물은 절대악보다 악해지곤 하지 않은가. 대표적으로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여전히 주저하고 흔들리며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얻지 못한 무력한 인물로 전락해 버린다.
선과 악의 경계에 있는 인물들 (조이서, 오수아, 장근수)
그래서 이 세 인물은 불편하다. 드라마 전체를 장악하는 거대 목표인 '복수'를 향해 가는 역경에서도, 또 하나의 거대 목표인 '사랑'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도 이 인물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편을 들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깊이 공감하기에는 그들의 서사과 정서가 충분히 설득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런 덜컹거림은 단지 각본과 드라마 연출이 치밀하지 못해서일까, 디테일에 소홀해서 발생되는 작은 문제일 뿐일까. 혹은 소시오패스와 현실주의자라는 요즘 시대에 쉽게 볼 수 있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들을 드라마에 반영하기 위해 채택한 캐릭터적 특성일 뿐일까. 이 드라마가 만약 그렇게 안일하게 구성되었다면, 결과적으로 이토록 큰 인상과 감동을 안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순간순간의 재미는 있었을지 몰라도. 처음 서론에서 말했듯,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그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이야기와 인물들의 에너지와 힘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마 중반부까지는 보는 내내 그런 덜컹거림이 계속 마음에 걸리곤 했었는데, 이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를 의외로 전혀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문제는 복수 드라마의 전형적인 공식, 그러니까 선이 악을 징벌한다는 그 구도로 드라마를 보는 나의 관점에 있었다. 이 드라마가 결코 선과 악이 대결하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은 드라마 최고의 명대사로 지금껏 인용되곤 하는 박새로이의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제가 원하는 건 자유입니다. 누구도 저와 제 사람들을 건들지 못하도록 제 말 행동에 힘이 실리고, 어떤 부당함도,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는, 제 삶의 주체가 저인 게 당연한, 소신의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박새로이가 꿈꾸는 건 '정의로운 세상'이 아닌 것이다. 악이 처벌받고 선이 보호받는 정의의 가치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주체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에 있다. 사실 정의와 자유는 둘 다 좋은 말이라 그게 그거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가치이며, 다르기에 그것을 추구하는 데 따라 선택되는 행동 양식도 달라진다. 가령 박새로이가 타인의 선택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그 선택의 선과 악, 옮고 그름과 상관없는 '존중'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는, 즉 주체적인 삶에 대한 존중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자신의 첫사랑이 자신을 배신하고 장가를 선택했어도(그 선택은 분명 배신이라 할 만하다. 오수아 스스로도 그것을 배신이라 칭한다), 그 선택을 존중하고 여전한 사랑을 간직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며(네 선택은 네 선택일 뿐이고 난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는 마음), 역시 자신을 배신하고 장가로 떠나 자신을 공격하는 장근수에 대해서도 결국 네 선택임을 존중한다. 그러니까 배신하였으므로 같이 복수의 묶음에 놓지 않는다.(중요한 건 내가 흔들리지 읺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복수의 대상인 장대희에 대해서도 비즈니스맨으로서 그 인생의 선택들을 존중하고 배우고 두려워하며 간혹 흠모(?)의 태도를 내비치기도 하는 것이다.(후반부 장대희와의 대면에서 이런 태도를 볼 수 있다) 선과 악의 구도에 균열을 내는 이런 태도와 행동은 결국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닌 타인의 선택을 타인의 것으로, 내 선택을 나의 것으로 보는, 각자 주체로서의 삶으로 보는 구도에서 본다면, 삐걱대는 것이 아닌 오히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구조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복수'로 치닫는 이야기의 외연을 하고 있지만, 힘없는 비주체가 힘을 가짐으로써 주체로 성장하는 '자기 극복'의 이야기라는 내면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의가 아닌 자유를 찾는 드라마이다.
정의가 아닌 자유, 복수가 아닌 자기 극복의 이야기
필자는 이 드라마의 그런 내심을 중반부부터 눈치채기 시작했는데, 특히 '자유'를 말하는 저 대사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이와 더불어 일본의 한 애니메이션의 대사가 번개처럼 번뜩 떠올랐다. 바로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하는 말이다.
지배 같은 건 안 해,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녀석이 해적왕이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의 구조와 원피스의 구조는 매우 흡사하며 추구하는 가치 또한 '자유'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원피스의 루피는 동료들과 함께 한 배를 타고 보물(One Piece)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 외피를 하고 있지만, 사실 루피가 찾는 것은 보물로서의 원피스 따위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건 '해적왕'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단지 해적왕으로서의 타이틀이나 명예가 아니다. 루피가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해적왕으로서의 '힘'이며, 그 힘은 단지 강하기에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얻고자 하는 힘이다. 결국 루피가 원하는 건 자신의 선택을 자신이 하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누구도 자신의 선택을 방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걸 가로막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는, 제 삶의 주체가 저인 게 당연한, 소신의 대가가 없는" 자유로운 삶이다. 그래서 그런 자유를 누리고자 하기에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와 맞설 뿐이다. 그 맞서는 상대가 나쁘기에, 악이기에 맞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혹은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가로막기에 주체로서 맞서는 것이다.(루피가 맞서게 되는 적 중에는 해군도 있으며 해군 장교복 뒤에 새겨진 문구가 '정의'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의'라는 가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주체로서 살다 보면 적은 항상 생길 수밖에 없으며 그런 적과 맞서고 극복해 나가야 하기에 항해는 결국 모험과 분투가 되는 것이다. 박새로이와 루피의 차이라고 한다면 루피는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모험을 떠나는 반면, 박새로이는 복수를 꿈꾸며 고난의 행군을 해나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가 결국 원했던 것은 복수의 통쾌함이 아닌 자신의 길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주체로서의 자유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장대희와의 마지막 대면 장면은 복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 그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의 선장, 박새로이와 루피
[이태원 클라쓰]와 [원피스]의 공통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 전반을 지배하는 가치관으로 인해 박새로이와 루피의 리더십도 일반적인 리더십과는 조금은 다르다. [이태원 클라쓰]에서 박새로이는 '단밤'이라는 배의 선장이며, [원피스]에서 루피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선장이다. 하지만 그들은 배의 선원들을 위해 자신을 마냥 희생하지 않으며(자기의 개인적인 목표가 언제나 먼저다), 선원들에게도 자신을 위해, 혹은 집단 전체의 목표를 위해 희생하기를 바라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박새로이와 루피는 모두 그들을 배에 들이는 데 있어 선택을 존중하며 항해를 해나가는 중에도 각자의 선택을 존중한다. 선장으로서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선택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질뿐(책임은 선택한 자의 몫이다) 그들의 선택을 강요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선원들의 반대 의견은 언제나 난무하며 의사결정자로서 그들의 의견을 참고하거나 무시할 수도 있지만(책임은 선택한 자의 몫이므로 의견을 반영할지 말지도 선택하는 자의 몫이다) 선택에 대해 찬성할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계속적인 반대와 심지어 탈퇴 또한 선택으로 존중한다. (실제로 조이서는 언제나 강경한 반대자이며 장근수의 탈퇴는 존중된다. [원피스]에서 우솝 또한 의견 불일치로 탈퇴하며 루피는 이를 존중한다) 그러니까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철저히 수직적이되 대우에 있어서는 수평적이다. 이것은 한 배를 탄 선원과 선장의 선택에 있어서 역할분담일 뿐이지 종속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각자의 선택이 존중되면 배가 산으로 갈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리더십은 강력한 소속감과 팔로워십을 창출한다. 박새로이의 단밤과 루피의 해적단도 그렇다. 또 한 가지 두 리더의 공통점은 절대로 스스로 그만두기 전에는 구성원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견에 반대하고 부딪힐지언정 서로를 의심하거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조이서의 매니저 명찰을 떼는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절대신뢰를 요구하는 것이며 이 점이 리더십의 가장 정점에 있는 원칙이다. 낙오자를 버리지 않고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 절대 신뢰는 두 드라마에서 감동과 눈물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정서이며, 지금 시대에 가장 멀리 있는, 사라져 버린 가치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이태원 클라쓰]를 보며 원작이 웹툰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원작자가 당연히 만화를 많이 보고 참고했거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통해, 이 드라마 기획의 원형에 [원피스]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강한 심증을 가져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서 결국, 정의가 아닌 자유의 관점으로 드라마를 본다면 위에서 혼란스럽다고 했던 인물들의 구분이 다른 경계로 재편될 수 있다. 그러니까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닌, 주인과 노예의 구도다. 이 드라마는 이야기 전개의 측면에서 보면 박새로이와 장대희라는 두 인물이 맞서는 구도로 되어 있지만,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뜻대로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과, 그 주인에 기생하며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주인의 판단과 선택에 휩쓸리는 삶을 살아가는 비주체, 즉 노예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구도로 보았을 때 박새로이와 장대희는 '주인'이라는 한 영역에 묶일 수 있다. 이것이 이 둘이 서로 싸우지만 기대고 있는 지점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며 에너지가 솟는 지점이다. 그 둘은 주인이라는 같은 영역에서 서로 싸운다. 주인은 노예를 적으로 삼지 않으며 오직 주인끼리만 서로 적이 될 수 있다. (드라마에서 계속 '신경 쓰인다'는 대사는 그런 지점을 의미하는 말이며, 후반부에서 죽어가는 장대희가 상대로 인해 활력이 도는 장면은 주인만이 주인으로서의 면모를 자극한다는 지점을 드러낸다)
주인과 주인의 대결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여성이 다른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타인의 감정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소시오패스 조이서는 주인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며, 오수아는 장가라는 집단과 회장(장대희)에 종속되어 휘둘리는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대표된다. 그렇기 때문에 로맨스에 있어서도 조이서는 거부하는 상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사랑을 지속하고 조력하며, 오수아는 일방적인 마음을 받는 위치에 있으며 자신 또한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로 주인의 몫이다. 사랑은 사랑을 받아야만, 사랑을 교환해야만 완성되는 그런 교환물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을 하는 자의 것이며 상대방이 그 사랑을 받을지 말지는 내 몫이 아닌 상대방의 몫이므로 그저 존중할 뿐이다. 나는 내 선택에 따라 사랑을 해 나갈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태도가 바로 박새로이와 조이서의 주체적 사랑이다. 드라마에서도 이런 말이 대사로 자주 등장하지 않는가.
마음은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야
사랑은 주는 자의 것이다. 그렇기에 조이서와 오수아의 후반부 대면에서 조이서의 대사는 통렬하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군요. 한 가지는 확실하네요. 적어도 당신보다는 내가 더 사장님을 사랑한다는 건" 오수아의 노예적 측면은 사랑에서뿐만 아니다. 일에 있어서도 그런데 후반부에서 오수아의 이런 면은 대사를 통해 직접 파헤쳐지기도 한다. 장대희가 무너져가고 있는 중 오수아에게 하는 말이다. "나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나는 경멸해. 자네가 왜 그런지 아나? 그게 바로 노예근성이야." 평생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듣는 말로는 너무도 가혹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한 인물을, 그것도 착실하게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 인물에게 상처를 안겨주며 무너뜨리는 데에서는, 이 드라마의 주제와 지향점을 알리고자 하는 작가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인물은 오수아 외에 장근원이 있다. 어쩌면 그가 가장 처절하게, 뼛속 깊이, 온전하게 노예로서의 삶에 충실한 인물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괴물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며 그런 면에서 장근수 또한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서자의 삶, 노예로서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던 인물이고 박새로이를 만나 또 다른 주인을 섬겨보지만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다른 주인을 섬기면서 떠도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끝내 파멸하는 장근원과 다르게 고뇌하고 선택을 옮겨간다는 면에서 주인로서의 상승을 꿈꾸는 인물이고 종국에는 그 실마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가능성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그가 극 중에 가장 자주 하는 대사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어" 혹은 "이제 내가 원하는 걸 할 거야"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얻는 방법이 어때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조이서 (주인의 삶) vs. 오수아 & 장근수 (노예의 삶)
이 드라마가 주인과 노예의 관점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건 여러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장대희와 오수아의 대사에서 뿐 아니라 후반부에 등장하는 책 한 권으로 여실히 드러난다. 조금은 뜬금없이 조이서가 책의 구절을 읽어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책은 바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며 니체는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개념화하여 노예로서의 삶의 태도를 버리고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주창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도덕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로서의 정신을 피력했던 자다. 그런 그의 철학의 정수가 담겨있는 책이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 책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필자는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에 대한 심증을 확증으로 굳힐 수 있었고, 이 작품이 노예도덕을 버리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 이야기로서 구상되었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삶이야 말로 끊임없이 분투해야 하는 삶이며 그런 분투를 통해서 비로소 영위될 수 있다는 걸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이 등장하는 장면은 이야기 흐름과 전혀 상관없는 전개라 의도적으로 주제를 위해 삽입되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특정 문장을 굳이 읽어주는 데서 다시 한번 그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삽입된 장면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이 드라마를 노예에서 주인으로 성장하는 성장드라마라는 좀 더 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등장인물은 노예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박새로이는 복수의 노예, 장대희는 장가의 노예, 장근원은 장대희의 노예, 장근수는 조이서의 노예, 오수아는 현실의 노예... 각자는 자신이 섬기는 주인 또는 주인의 가치를 숭상하고 집착하며 놓지 못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드라마의 대미에 이르러 모두는 그 집착의 대상으로 인해 파멸하거나 혹은 극복하거나 두 갈래의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단연 조이서라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조이서는 무엇의 노예인가. 재미있게도 그녀는 아무것에도 의미를 두지 못하는, 그러니까 무엇에도 집착하지 못하는 무의미에 시달리는 허무의 노예다.(드라마 시작은 조이서가 상담하면서 삶의 허무함을 토로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시작을 그런 장면으로 두었다는 건 역시나 이 드라마가 주제의식에 따라 짜임새 있게 배열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추구하는 것이 없음으로 인해 공허해진 마음을 움켜쥐고 열심히 사는 것이 최선임을 알지만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귀찮을 뿐인, 그래서 무엇에 있어서도 주인이 될 수 없는 허무의 노예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주인이 되지 못하는, 주체적으로 사는 듯이 보이지만 마음은 허전한 특이한 인물인 조이서는 그렇기 때문에 소시오패스다. 어쩌면 그녀는 소시오패스이기 때문에 공허해진 것이 아니라 공허하기에 소시오패스가 된 건 아닐까? 드라마를 보면서 왜 소시오패스여야만 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시대적인 공감도 있고 착한 인물이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도 부조리한 세상이라는 점 때문에도 그러했겠지만, 아마도 우리 모두가 소시오패스가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경고 같은 게 아니었을까, 라는 과잉된 생각도 해본다. 드라마에서 단서가 없는 건 아니다. 조이서의 어린 시절, 달리기 하다 이기기 위해 1등을 밀치는 아이를 보고 엄마는 딸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태도임을 반기며 드러내지 않지만 조용히 응원한다. 소시오패스 성향을 오히려 부추기는 것이다. 어머니의 직업은 전형적인 일반회사 또는 공무원의 리더이다. 지금의 소시민적 가치가 얼마나 하락하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성공의 노예로, 돈의 노예로, 남들의 자랑거리를 위한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걸 부추기는 기성세대와 사회는 얼마나 문제인지 경고하는 장면이다.
경쟁을 위해 타인을 해하는 아이를 탓하지 않는 부모
드라마 대미에, 로맨스를 종결짓기 위해선 당연히 조이서와 박새로이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야 했겠지만, 마지막 키스신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이런 것이 우리가 소시오패스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공허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삶이다. 주체로서 선택해야 하는 태도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것이며, 사랑은 사랑해야 비로소 배울 수 있다.
사장님하고 나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지만 닮은 점이 하나 있어요.
사람의 온기를 몰라.
...
사장님의 지난 아픔들 내가 다 보듬어주자 했어요.
힘들지 않게 해주고 싶었어요. 외롭지 않게.
사장님의 쓰린 밤을 달달하게 해주고 싶었어.
사장님을 생각하면 공허한 내 일상이 사장님으로 벅차올라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
행복하고 싶었다.
나를 잃지 않고 원하는 전부를 이루고 싶었다.
힘든 나날이 있었다.
때로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어떻게 버텼을까.
소중한 이들과 하고 싶은 걸 하며 정신없이 보내온 나날.
이들 곁에 있는 것.
이들과 함께 하는 것.
행복을 찾아서.
행복, 너와 나누는 온기.
마지막 키스신에서의 대화
p.s. 마지막으로 박서준, 김다미의 연기도 너무 좋았지만, 역시나 장대희 역의 유재명 배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이로운 연기로 드라마 전반에 에너지를 넘쳐흐르게 해 주었던 유재명 배우에게 존경과 찬사를!
각본: 조광진 (웹툰원작: 광진,『이태원 클라쓰』)
연출: 김성윤, 강민구
출연: 박서준, 유재명, 김다미, 권나라, 안보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