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봐야, 예술이 된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을 두 번 보며 알게 된 것들

by 빨간우산


모든 영상물은 두 번씩 볼 필요가 있다는 걸, 절실히 절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적극적인 독해가 필요한 책이나 가만히 응시하는 머무름이 요구되는 그림과 달리, 영상은 빠르게 지나가는 속도와 그에 따른 수동적인 감상 태도를 조건화하는 매체 속성으로 인해 작품에 담긴 각종 미학적 장치와 부여된 의미들을 대부분 놓치고 지나가기 일쑤이며(대부분 스토리와 대사를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무엇보다 수동적인 해석(사실상 거의 해석되지 못하는 텍스트)에 그치고 마는 수용자의 태도로 인해(그것은 게으름의 문제라기보다는 매체의 속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한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그것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기보다는 그저 심심할 때 찾는 간식거리처럼 순간적으로 소비해버리곤 한다. 마치 음식의 맛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듯 먹을 때의 감각적 쾌감에만 집중하고 그 맛의 오묘함을 굳이 다시 떠올려 음미해 보거나 그 맛의 성분 따위를 분석하지 않게 되는 것과도 같다. (안타깝게도 이런 경향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다. '가속화'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이제 영상물의 감상은 '짤'로 분절되어 맥락을 거세당한 채 '파편화'되어가고 있다)


유튜브를 비롯한 디지털 플랫폼은 영상 컨텐츠의 수동적 수용의 가속화를 넘어 파편화를 유도한다.


그렇기에,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은 두 번 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제작자가 공을 많이 들였거나 완성도가 높은 작품일 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작품들의 경우 처음 볼 때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각종 요소나 의미들이 특히나 더 많이 보이곤 한다.


요즘 『그 해 우리는』을 두 번째 보고 있는데, 이 작품이 그렇다. 인물의 다면적인 성격이나 동기, 사건이나 대사가 전체 맥락에서 가지는 의미, 이야기 전개가 전환되는 시점과 그 자연스러움을 위한 치밀한 계산 등 극본에서의 완성도뿐 아니라, 연출에 있어 카메라 앵글의 각도나 숏의 길이에서부터(응시하는 호흡의 시선이 안배되어 있다), 각종 오브제 사용의 은유적 의미에서부터 하다 못해 배우의 옷차림과 화장에서까지 이야기와 섞이려는 간곡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서는 '조명'에 무척이나 공을 들이고 있는데, 청춘 멜로의 특성 답게 풋풋함과 설레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함이 첫 번째 목적이겠으나, 단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실내 조명의 과도한 활용(심지어 낮에도 조명에는 전부 불이 들어와 있으며 오만군데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이나 실내, 실외를 가리지 않고 자연 채광을 최대한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세심한 배려는 가히 장인의 수준에 이른다. 이쯤 되면 조명과 빛의 미학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한번을 더 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조명과 채광에 공을 많이 들인 드라마 『그 해 우리는』


왜 이렇게 조명에 공을 들였는지는 조금 의아할 정도로 궁금해지는데, 단지 설렘을 증폭시키기 위한 목적 이상의 어떤 의미의 무게가 실려있지 않나 짐작해 본다. 가령 이 드라마의 이야기 모티브, 지향하는 주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해 우리는』은 전형적인 청춘 멜로 장르를 따르지만 단지 두 주인공의 '멜로'뿐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이 상처와 결핍을 극복하는 청춘의 홀로서기를 위한 '분투와 성장'을 모티브로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 또한 그들의 두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만이 아닌 각자의 독립과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멜로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조연들의 서사에 대한 배려를 놓치지 않고 있다. 조연들도 각자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가진다고 할까) 그렇다보니 드라마의 각종 표현 요소는 두 주인공의 감정선의 변화를 드러내는데 뿐 아니라 각자의 상처와 성장을 보여주는 데에도 상당히 공들이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해석해보자면, 드라마 전반에 흐르는 조명과 빛은 어둠을 밝히는 표현 요소이며 그들이 겪는 아픔과 상실이라는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되어 있는 그들의 에너지와 희망같은 것을 빛을 통해 보여주려했던 것은 아닐까. 어두운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들의 의지와 희망을 비춰주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빛과도 같은 생명력 말이다. 그래서 청춘은 언제나 빛날 수 있음을, 결코 어둠에 가려지지 않을 수 있음을 빛의 존재로 밝혀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과도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 어떠하겠는가. 그렇게 보면 또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이는데로 본다면 드라마는 훨씬 더 재미있고 의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공식 포스터에서 빛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헤어짐의 순간에도 빛은 희미하지만 살아있다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중반부 키스신에서는 카메라가 해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러니까 두 번을 보면 이런 다양한 해석과 의미들을 발견하거나 적극적으로 독해할 수 있게 된다. 어디 두 번뿐이랴. 세 번 네 번을 보아도 극본과 연출, 스텝과 배우 그 모든 사람들이 한 작품에 들인 공을 다 볼 수는 없을테니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상물이란 수용자에게는 한없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오락물일뿐이겠지만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온갖 것을 다 고려해야 하는 종합예술품이다. 작품에 동원되는 그 모든 요소들을 꼼꼼하게 만들고 배치하고 연출했을 때 비로소 우리가 껄끄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현실 같은 가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백조가 우아하게 물 위에 떠있기 위해서는 밑에서 치열하게 발을 굴러야 하는 이치와도 같다. 자연스러움이 그저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이해한다면 그 자연스러운 이야기 흐름을 위해서 동원된 각종 노력과 장치들을 발견해 내는 재미는 쏠쏠해진다. 그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을텐데 자연스러운 연출 이상의, 예술성을 담보하기 위한 각종 표현 요소들까지 발견하고 감상하려한다면 그 재미는 어마어마하게 증폭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재미를 한번 알게 되면 스토리와 대사, 배우의 예쁨/멋짐 따위만 쫓아가던 첫 번째 감상이란 빈약하게 느껴지고 만다. 그러니까 첫번 째 감상에서 내가 본 것은 그 작품이 표현하고 말하는 전체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걸 알고 있어도, 우리가 보는 영화나 드라마들을 두 세번씩 감상하게 되지는 않는다. 막상 다시 보려면 왠지 귀찮은 마음이 드는게 사실이기 때문. 하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난다면 다시 한번 보게 되는데 그럴 경우엔 다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반드시 들게 된다.


좋은 작품일수록 여러 번 보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 해 우리는』을 다시 보면서 매 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을 발견하며 감탄할 때마다 다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한 번 더 볼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16부작 드라마도 그러한데 영화는 왠만하면 두 번을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매 번 그렇게 결심하지만 매 번 그렇게 되지 않게 되버리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결론은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도 꼭 두번 이상 보자'라는 것이다. 두 번 이상 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작품을 간식거리가 아닌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되고 그럴 때 그 작품은 '예술'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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