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는 두 번째 볼 때가 더 좋다고 했던가. 라라랜드는 본지 한참 된 영화지만, 여기저기서 그 '좋음'이 얼마나 좋은지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들려와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의 칭찬은 과장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같이 본 사람들도 전에 봤었다는데, 영화가 끝나자 모두들 '이 영화가 이렇게 좋았었던가'하는 말을 동시에 내뱉었다. 좋은 영화를 다시 재발견했을 때의 뿌듯함이란!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가 말해보자.
우선, 이야기 전개에 군더더기가 없다. 좋은 이야기란, 특별히 늘어지는 부분이 없고 인물의 행동이 작위적이지 않으며 별 다른 의구심을 가질 시간은 주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내달린다. 특히나 이런 뮤지컬 영화의 경우에는, 음악과 퍼포먼스에도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의 개연성이나 주인공의 성격 규정, 행동의 동기부여에 할애할 시간적, 상황적 여력이 별로 없다는 난점을 고려한다면, 이토록이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내달릴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시나리오와 연출력이 뛰어나다는 것. 감독의 역량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에서 우린 그의 연출력을 이미 한번 실감한 바 있다.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
이야기뿐 아니다. 사실 이야기는 영화에서 '기본'에 해당된다. 기본만 잘 갖추어도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지만, 역시 이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음악의 뛰어남은 아무리 추켜세워도 모자람이 없다. 자고로 뮤지컬이란 이야기도, 연기도, 퍼포먼스도 좋아야 하겠지만, 음악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면 나머지는 한순간에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어찌 보면 뮤지컬 영화의 진정한 기본이란 '음악'인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음악이 좋다. 귀에 익숙하게 들리는 멜로디에서부터, 상황과 역할에 따라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로 변주해 내는 편곡의 묘미까지. 뮤지컬에서 말하는 '리프라이즈', 즉 동일한 멜로디의 다양한 변주를 이 영화는 훌륭히 해내고 있다. 모두 같은 노래인 듯, 다른 노래처럼 변주함으로써 편안하게 들리고 쉽게 몰입되지만, 표현하는 정서와 감정만은 상황마다 완연히 다르다.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는 많지만, 핵심이 되는 멜로디 라인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의 멜로디가 있고, 커플의 멜로디가 있으며, 여자 주인공의 멜로디가 있다. 하지만,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리프라이즈'를 막기 위해, 중요한 장면에서는 단독의 곡을 삽입하여 새로운 감정, 새로운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가령, 여 주인공이 마지막 오디션에서 파리를 회상하며 부르는 노래, 'Audition'이 그러하다. 라라랜드의 히트곡이라고 한다면, 다른 곡들이 많지만 사실 나는 이 노래가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노래 자체가 이야기의 요약이면서 주인공들의 삶을 가장 적절히 대변하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가장 간결하게, 하지만 가장 열렬히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 곡은 그 자체로 영화 전체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가장 많이 변주됬던 'city of stars'
음악 이외의 춤, 의상, 특수효과 등등의 요소들은 또 어떤가. 이 영화는 시작에서부터 빨려 드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던가. 영화 내내 펼쳐지는 퍼포먼스의 정교함과 창의성은 감탄할 겨를마저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으로 우리의 흥분을 자극한다.
화려한 영화의 오프닝 'another day of sun'
이토록 칭찬할 것이 많은 영화지만, 정작 나는 이 영화를 뮤지컬 영화로서 보다는 두 인간의 성장과 깨우침을 담은 실존적 삶의 영화라는 면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 빛나는 하나의 단면을 영화의 백미가 되는 그 곡, 'Audition'의 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금은 미쳐도 좋아 지금까지 없던 색깔들을 보려면 그게 우릴 어디로 이끌진 아무도 몰라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이 필요한거야 그러니 모두 불러요 반항자와 이단자 화가와 시인과 광대들
꿈꾸는 바보들을 위하여 비록 미치광이 같은 그들이지만 부서지는 가슴들을 위하여 망가진 삶들을 위하여
- 영화 속 노래 'Audition' 중 -
사실, 그렇게 말하는 건 쉽다. '진정한 나의 삶을 위해서는 미쳐야 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얼마나 무책임하면서도, 얼마나 상투적인 말이 돼버렸는가. 끊임없는 생존의 위협과 경쟁의 압박에 내몰리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래서 안정과 안락이라는 사소한 행복을 좇도록 내모는 이 정글 같은 환경에서, '미쳐야 산다'는 말만큼 공허하고 막연한 말도 없다. 그래서 그렇게 공허하고 막연히 멋져 보이는 말은 영화 안에서나 소비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멋진 영화였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말속에는 '영화니까 가능하지'라는 체념과 푸념이 숨겨져 있다.
이 영화도 그런 수많은 '멋진 영화'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허망하게 멋진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만들어낸 영화'에 그치지 않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디션에서의 그 노래는 하고자 하는 말의 진정성을 담으려는 수많은 노력 중의 하나이자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Audition'을 부르는 장면
하나를 더 꼽아보자면,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 '영화 속 영화'가 등장하는 또 다른 판타지의 등장이다. 그 장면은 왜 삽입되었는가. 여러 각도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전에 TV 프로그램 '방구석 1열'에서 말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전 뮤지컬에 대한 오마주와 존경의 헌사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직접적이고 납득하기 쉬운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신(scene)들은 단지 판타지 하나가 더 삽입된 의미 이상을 담고 있다.
일단, 결론이 다르지 않은가. 왜 다른 결론을 판타지로 삽입해 넣었는가. 그것은 영화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의 간절함과 절박함, 그리고 그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삶의 가치와 의미들이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그저 하나의 판타지로 보여지고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담은 건 아닐까. 만약 이 영화가 마지막의 판타지처럼 결론을 맺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겠지. '그래, 멋진 영화였어'. 그렇게 끝내고 허망하게 잊히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 영화의 실제 결말이 두 주인공의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고 각자의 삶으로 귀결된다는 건, 그런 면에서 아주 큰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영화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니라 새드 엔딩인가?
다른 결말을 보여주는 마지막 영화 속 영화
이 영화를 두 남녀의 로맨스로 읽는다면 그것은 새드 엔딩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둘 간의 사랑은 그저,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에 들러가는 하나의 정거장 같은 경험의 과정일 뿐이다. 나를 성장케 하는 갈등과 계기일 뿐이다. 영화는 각자가 추구하는 각자의 어려운 목표에 대해 말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고 있다는 걸 영화를 두 번 보면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그 둘이 만나 데이트를 하며 나누는 대화들을 생각해보라. 그 대화들은 단지 '사랑의 속삭임'이 아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더할 나위 없는 해피 엔딩인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장면의 그 판타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이고 그래서 오래된 뮤지컬 명장면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그들을 존경해 마지않지만, 그렇다고 단지 뮤지컬 영화인 것만은 아니야. 뮤지컬 영화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끝나야만 한다는 건 그저 하나의 판타지일 뿐이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단지 달콤한 사랑의 사탕발림은 아니라고!'
과연 내 생각이 지나친 억측인 것일까? 영화를 두 번째 보고 난 지금, 나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물론 근거 없는 확신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