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숨을 곳이 없다"라고 김홍중 교수는 그의 책 『은둔기계』에서 말한다.
1인 가구와 자기 과시의 시대, 혼자와 핵개인의 시대에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오히려 고립과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시대에 더욱 은둔하라니.
오늘날은 이상하게도 반대의 극단이 서로 만나는 현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토록이나 모든 것이 연결되는 네트워크 시대에 인간과 인간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단절되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 이렇게나 쉬워진 환경에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린다. 재미 요소와 즐길 거리들이 이토록이나 풍요롭고 많아진 시대에 우리는 공허와 지루함에 시달린다. 이렇게 극단이 만나는 현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쩌면 풍요 속의 빈곤, 군중 속의 고독, 말속 무의미와 같은 아이러니가 일상 속에서 이토록 공감되는 때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그렇다. 우리는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다.
은둔 또한 마찬가지다. 단지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전부였던 예전 20세기 아날로그의 세상과 전 세계의 모든 것으로 무한 확장 연결된 21세기의 디지털 세계는 전혀 다르다. 손만 뻗으면, 아니 손가락만 움직이면 언제 어디서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만남이라는 용어보다는 '컨택'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겠지만) 지금의 네트워크 환경은, 그 접근성의 용이함, 편리함, 단순함으로 인해서 오히려 의도치 않게 나를 모든 이에게 무방비 노출시킨다. 예전에는 누군가 멀리 떨어진 사람과 만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했고 그도 모자라 하늘의 운도 필요했지만(그래서 '인연이 닿는다면'과 같은 표현이 필요했다), 오늘날에는 거꾸로 누군가와도 만나지지, 컨택되지 않으려면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 디지털 상의 소셜 미디어의 모든 계정을 닫거나 멈춰야 하고, 메신저는 무시하거나 삭제해야 하며, 어쩌면 스마트폰 자체를 폐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쉽게 단절되고 나의 노출을 막을 수야 있겠지만 그에 따르는 대가는 혹독하다. 이제 디지털 상의 계정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 내에서의 위치와 자리를 잃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극단적인 조치는 자신의 존재를 방치하고 스스로 집단 내 소외를 자초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사회적 존재를 내가 말소하는 일이 될 수 있으므로 그건 생각보다 크게 치러야 하는 삶의 대가가 될 것이다. 나아가 일반적인 사회 활동과 생업 활동조차 어려운 환경에 놓이는 것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둔의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단지 은둔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를 반문해 본다면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 모든 사회적 소외를 감수하고 내가 은둔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지금의 시대에 은둔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기술적인, 환경적인 문제가 아닌 그것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어쩌면 그건 사회적 소외보다도 더 큰 은둔의 장애일지 모른다.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건 누군가 먹다 버린 사과 한쪽의 가치보다도 못해 보인다. 그러니까 굳이 그것을 왜?...
하지만 김홍중 교수가 말하는 은둔은 필요하다. 세계는 숨을 곳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상징적인 표현 같은 것이다. 세상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거나 나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도망쳐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숨을 곳'이란 '나의 사적인 곳'이라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즉 누구의 간섭도, 평가도, 시선도 미치지 않는 오직 '내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혹은 '내가 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그런 시간과 장소 말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시간대이든 어떤 장소이든 그 물리적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군중 속에서도 얼마든지 고독할 수 있고 풍요 속에서도 얼마든지 빈곤할 수 있으며 쏟아지는 말속에서도 얼마든지 침묵할 수 있듯, 언제 어디서라도 외부와 스스로 차단되어 자신 안의 세계로 침잠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을 말한다. 그렇게 순간으로 몰입되는, 내가 나에게로 몰입해 들어가는 경험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니까 자꾸 내 옆에 스마트폰을 의식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새로 올라오는 포스팅을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누군지 모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나 나를 자극하는 그 무엇을 구경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으면서, 심지어 나의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걱정에 나를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그 모든 외부의 세계,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와 차단된 오직 순간의 세계와 대면하고 있는 나의 시간과 장소, 그것이 곧 '은둔'이다.
그것은 '고독'이라 말해지기도 하고, '순간'으로 말해지기도 하며, '몰입'이라고도, 혹은 '나의 세계'라고도 말해질 수 있지만 굳이 '은둔'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선택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앞서 말했듯이, "세계는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숨어 들어가려는 적극적이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마련할 수 없는, 이제는 없어져버린 나의 장소, 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난 은둔하기 위해 애를 쓴다. 애를 써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은둔은. 그것은 외로움이나 고립과 소외와는 다른 것이다.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에 의한 따돌림과 배제가 아니다. 나 스스로 주변 환경을 내게서 배제하는 일이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상태처럼 보이지만 그 반대다. 매우 적극적이고(적극적이어야 하고) 매우 긍정적인(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은둔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숨을 곳이 없어져버린 지금의 디지털 시대에,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하는, 되찾아야 하는 나의 자리인 것이다. 그런 은둔의 시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휩쓸어가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디지털의 광폭한 소용돌이에서 나를 구해낼 수 있다. 나를 비로소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나를 향해 입 벌린 거대한 공허와 불안으로부터 온전한 나를 지켜낼 수 있다.
현대인에게, 우리에게, 너와 나에게 은둔은 삶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삶의 방식 중 하나가 아닌, 삶이냐 죽음이냐의 기로에 놓인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생명의 길이다. 그 길을 찾아 떠날 수 있는가, 아닌가는 오직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다.
"세계는 숨을 곳이 없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