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왜 이렇게 당연한 말을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말이 은근한 진실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막연히 든다면, 그건 단지 당신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착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말에 은근히 공감하게 되는 걸까.
그렇다. 사람은 관계하고 친해지는 대상이지 마트에서 물건 사듯 소비하는 대상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사고 파는 행위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걸까, 혹은 스마트폰으로 사람을 구경하는 시선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여기서 '구경'한다는 것은 사람을 '한 개인과 그의 삶'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로서, 그러니까 구경할 만한 구경'거리'로서 소비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동물원에 가서 일정 비용을 치르고 동물들을 '구경하며 신기해하지' 그 동물들과 관계하고 삶을 함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식당에 가서 역시 비용을 치르고 음식들을 '맛을 보며 즐기지' 그 음식의 재료들과 조리과정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마트에 가서 물건들의 이런저런 속성들을 따지고 저울질하여 '내 것으로 만들지' 그 물건들이 기획되고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무언가를 대상화하여 구경하고, 맛보고, 소유함으로써 나의 욕구를 채우는 일을 우리는 '소비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동물원의 동물들과, 식당의 음식들과, 마트의 물건들은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한 대상이지 친해지고 관계하며 우리의 삶을 같이 누리고 경험하는 동반자는 아닌 것이다. 왜 이렇게 당연한 얘기를 늘어놓는가. 소비와 관계가 엄연히 다른 행위라는 건 추상적인 설명으로도, 구체적인 예로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이르면 전혀 당연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도 소비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처럼, 식당의 음식처럼, 마트의 물건처럼 말이다.
소비와 관계의 차이는 아주 분명하다. 소비는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대상을 선택하는 행위이지만,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우리는 삶을 누리고 함께하는 동반자에게 단순히 나의 욕구를 채워주기만을 바랄 수는 없으며 나 또한 그의 욕구의 대상만이어서는 안 된다. (그 동반자가 친구이든, 동료이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우린 그들과 정서적으로 친해지는 과정을 필요로 하며 그 과정에서 단지 그 사람의 속성(나이, 직장, 학력 등등) 이상의, 성격과 취향, 습관과 가치관, 고민과 꿈 등등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자연스럽게 동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인 관심이 서로 교감을 이룰 때, 그래서 서로 간에 정서적 친밀감과 유대감이 형성될 때 그런 관계의 형성을 우리는 '친해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친해지는 과정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단지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따뜻한 면만 존재할 수는 없다. 성격과 습관은 부딪히기 마련이며, 취향과 가치관이 엇갈려 갈등하고 싸우기도 하고, 고민을 들어줄 땐 힘겨움이, 꿈에 대해서는 응원보다는 질투의 마음이 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이러한 갈등과 힘듦을 감수하고 친밀과 유대의 끈을 유지해 간다. 그리고 그렇게 유지하는 끈이 두터워질 때, 그런 관계의 힘은 '믿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내가 힘들 때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 내가 잘 될 때 나를 응원해 줄 거라는 믿음, 나와 싸우고 멀어져도 다시 화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란 오랜 시간의 갈등과 복잡한 감정적 교류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고 또 그런 만큼 견고해진다.
자, 장황하게 관계에 대한 당연한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벌써부터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 관계한다는 그 끈의 견고함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 이미 느끼고 있다. 인간관계의 세태야 그렇게 변하기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는 방식과 스타일도 마치 유행처럼, 트렌드처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단지 인간관계의 방식만은 아니다. 인사를 할 때 허리를 숙여야 할지, 손을 흔들어도 될지, 악수를 해야 할지, 힙하게 어깨를 부딪혀야 할지, 뭐 그런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친밀감과 유대감을 이어주는 관심과 믿음의 끈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 끈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말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는 디지털 소통의 시대에, 우리는 관계가 소비가 되는 거대한 변화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고 있다.
어떻게 하다, 사람이 사람마저 물건 사듯, 음식 먹듯, 구경하고 고르고 평가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치 구매 후기를 남기며 인터넷에 후기를 달 듯,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속성들을 평가하고 저울질하며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라는 건 단지 사람 간의 성격적 궁합, 취향과 가치관의 공유 같은 걸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과 더 잘 맞기도 덜 맞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할 때, 혹은 나에게 불쾌를 유발할 때,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곤 하는 것이다. 마치 옷이나 음식이 마음에 안 들 때, '내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듯.
사람들을 내 욕구의 대상으로 세워두고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내 욕구를 채워주는지 아닌지)를 저울질하는 일은 그 사람과 관계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소비하는 일이다. 그렇게 사람을 소비하는 태도가 될 때 그 사람이 내 욕구를 채워주는지 아닌지만 중요할 뿐, 정작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고민하는지 따위는 관심 밖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 음식을 먹을 때, 그 물건과 음식이 얼마나 힘겹게 만들어졌을지에 대해서는 따져보지 않는 것처럼. 오직 그것의 기능과 맛만을 따질 뿐이다. 이렇게 사람을 소비하는 태도가 될 때, 우리는 사람을 그토록 간편하게, 그토록 빨리, 그토록 도구적으로, 친해졌다 멀어졌다 손절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는 계속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나랑 잘 맞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는 거야."
물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잘 맞아야 관심도 가고 친해지기 위해 노력도 하게 되고 서로 서운하고 힘들어도 이겨낼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순전히 노력만으로 될 수는 없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하는 얘기는 '사람과 사람이 얼마나 잘 맞기가 어려운가'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우리가 사람을 관계할 인간으로 보지 않고 소비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친한 사람이든 안 친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간혹 이런 태도는 친밀과 유대가 필수적이고 믿음이 꼭 필요한 관계, 그러니까 친구나 연인, 부부나 가족 간에 나타나기도 한다.(굳이 뉴스에서 본 사건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나는, 우리는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조차도 내가 필요할 때 내 욕구를 채울 어떤 무엇,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우리는 당연한 것 같지만,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당연하지 않게 된, 잘 알지 못하게 되어버린, 이 말을 계속 되뇌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욕구와 필요를 채우는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관심과 배려와 응원과 믿음을 이어나갈 관계의 동반자다.
그러니, 나 스스로 내 인간관계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혹시 내가 그 사람을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그 사람이 나를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사람들과 관계하고 있는지, 소비하고 있는지. 나는 관계 속에 있는지, 소비로 대상화되고 있는지. 겉으로는 종이 한 장 차이처럼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은 하늘과 땅보다도, 지구와 달보다도, 태양계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고 먼, 전혀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