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중요한 시대다. 어느 때고 인간사에 자존감이 중요하지 않았겠냐만, 최근 들어 특별히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중요하게 취급되는 건 아마도 그 반대의 현상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만큼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가 어려워진, 혹은 자존감 훼손이 쉬워진 사회문화적 환경 때문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날을 세우고 경계하거나, 자신의 자랑거리를 드러내는데 몰두한다. '자존감'을 키워드로 하는 심리학 도서들은 쏟아져 나오고, '스웩(SWAG)'이라던가 '플렉스(FLEX)'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것도 단지 특정 음악 장르의 영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뭐든 과하면 좋지 않은 법. 스웩 문화로 대변되는 자기 과시의 문화는 그 정도가 지나치거나 혹은 너무 자주 타인의 과시를 경험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반발 심리가 커지게 되어버리는데, 무엇이든 그렇지 않은가. 어떤 경향이 너무 잦고 지나치게 경험되면 그것의 옳고 그름, 혹은 정당함이나 부당함, 타인에게 미치는 피해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냥 보기 싫어지는 저항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는 것 없이 꼴 보기 싫다'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딱히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이득을 주는 것도 아닌 데 그저 보고 싶지 않다랄까. 이런 마음이라는 건 어찌 보면 부당해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도 인간적인 마음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란 그렇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기만 한 '동물'은 아니란 걸 이제 우리는 잘 안다. 불합리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갈대 같은 인간의 마음은 때론 별 근거도 없이, 마땅한 명분도 없이 그렇게 어떤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인간적인 마음의 나약함이 모두 용인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지'라는 넓은 마음의 관용적 태도는 필요하겠지만, 그 관용이 무한정 혹은 어떤 경우에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누군가 '꼴 보기 싫은' 마음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로 인해 누군가를 근거도 없이, 혹은 근거가 있다 하여도 무한정 비난하는 일이란 온당하지 못하다. 어떤 누군가가(정치인이라고 해보자) 부당한 일을 저질렀을 경우에 그래서 어떤 이에게 혹은 많은 이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한다면, 그것의 부당함을 합리적으로 따지고 드러내어 많은 이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비판'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비난'은 다르다. 그것은 어떤 근거를 들어 문제를 분석하여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의 부적성을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대개는 어떤 근거에 기반하지 않고, 혹은 단순한 몇 가지 정보 또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기대어, 특정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편향적으로 생산하여 확산하는, 한 가지 문제를 한 인간의 전체 문제로 해석하는 과장의 방식으로 확대하여 '감정적인 공격'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게 오해와 과장에 기반하여 감정적으로 공격적 태도를 가지고 타인을 인간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우리는 '비난'이라고 한다. 혹은 '혐오'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타인을 '비난'하는 태도는 오늘날 사회 전체에 만연된 분위기로 형성되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개인의 심리적 영역에까지 깊이 파고든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로 시작하여 비난이란 개념으로 비약했지만, 사실 이 두 단어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자존감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집착하는 이유는 자존감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낮기 때문이고, 그래서 낮아진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간단하고 쉬운 방편으로 모색되는 방법이 바로 비난이기 때문이다. 비난을 하고 나면 비난을 한 자는 비난을 받은 자에 비해 '높은 위치'에 서는 듯한 착각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착각 위에 세운 높은 위치에 서는 순간 자존감은 일시적으로 회복된다.(타인을 평가하거나 훈계하는 행위도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진다) 하지만 이렇게 타인에 대한 비난에 기대어 억지로 세워진 자존감은 말 그대로 진정한 자존, 즉 '스스로 자신을 세우는' 행위가 아니므로 다분히 허위의 감정에 가깝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구름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그 높은 지위를 스스로 만끽하지만 밑을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는 공허한 감정이랄까. 때문에 이렇게 타인을 비난(평가, 훈계)해서 얻는 공허한 감정을 우리는 '자존감'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밑바닥이 없는 허상의 감정, 즉 '우월감'이라 칭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타인을 비난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나 또한 비난을 쏟아내다 보면, 누군가는 그 비난의 화살에 맞아 자존감 훼손에 쓰린 가슴을 움켜쥐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훼손된 자존감을 급히 회복하기 위해 다시 누군가를 비난하여 우월감을 얻으려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완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우월-비난의 악순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타인을 비난하기에 최적의 환경인 디지털(소셜 미디어) 환경을 만나 그야말로 폭발하기에 이른다. 타인을 비난할 때 자신의 정체성과 명예를 걸지 않아도 되는, 잃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의 손가락질은 너무나도 수월하고 달콤한 유혹처럼 사람들을 비난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인다.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이런 우월-비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눈과 귀를 막아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들리지 못하게 해야 할 지경인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오늘날 누구도 스마트폰이라는 세이렌의 노래로부터 인간을 분리할 수는 없다. 스스로 스마트폰으로 향하는 눈과 귀를 막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교에는 술 취한 코끼리처럼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심리 요법으로 '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 마음 챙김이라는 개념은 그리 어럽지 않은데, 그저 내가 어떤 마음인지를 내가 알아채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래서 마음 챙김을 '마음 알아채기'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많이 얘기되는데,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기 전에 자신의 화나 있는 상태, 그 들끓는 마음을 알아채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화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왠지 말도 안 되는 토템 같은 요법으로 들리겠지만 막상 실행해 보면 알 수 있다. 꽤나 효과가 크다는 것을. 그러니 비난의 세이렌의 노래가 들리면 이렇게 되뇌면 되는 것이다. '오늘도 비난의 노래가 들리고 있군' 그러면 우월-비난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어 가는 나를 알아챌 수 있고, 알아채면 멈출 수도 있게 된다. 다만 이 방법의 함정은, 방법을 설명하는 건 아주 간단하지만 실천은 힘들다는 점에 있다.
대개 인간의 감정은 부정적인 쪽으로 쏠리는 경향을 가진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물주가 있다면 원망하고 싶기도 하다. 인간을 왜 이렇게 설계해 놓았는지 따지고 싶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은 더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분노와 비난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밀려올 때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거나 그래서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여유를 갖기 어려워진다. 내가 분노와 미움, 비난 같은 부정적 감정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그 마음과 나를 분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과해지면 어느새 내가 분노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닌, 분노와 비난이 나를 몰아세우는 경지(?)에 이른다. 그야말로 물아일체... 가 아닌, '정아일체(情我一體)'의 상태에 입적하게 되는데, 그렇게 감정과 내가 일체가 되면 그땐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된다. 아마도 과격한 폭력 또는 살인이 자행되는 과정은 이러한 수순을 거치는 게 아닐까 싶다. (사이코패스의 냉정함이 아니라면)
그러니 우리, 누군가를 비난(평가, 훈계)하여 우월감이라는 가짜 자존감에 취해 우월-비난의 악순환에 가담하지 말고,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높일 수 있는, 조금은 어렵고 시간이 걸리지만 단단하고 두터운 자존의 근거가 되는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자. 그렇게 차근차근 쌓인 실력은 아주 강력한 자존의 갑옷이 되어 어떠한 비난과 공격에도 상처받고 훼손되지 않는 심리적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덧.
물론 요즘 유명인에게 자행되는 사회적 비난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심리적 방패로 막을 수 있는 문제의 수준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단련하여도 인간은 타인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로 살 운명을 지고 살며, 그런 운명의 조건에서 인간은 때로 한없이 약한 채로 공격에 무방비 노출될 수밖에 없다.(더군다나 요즘 같은 소셜 미디어 시대라면 더욱더) 그래서 우린, 한 인간에게 가해지는 전 사회의 가공할 만한 비난의 폭력을 '인격 살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물론 특정한 집단과 세력이 그러한 폭력의 장치와 재료를 마련했다 하겠지만, 결국 그 폭력의 자장에 우리 모두가 일부분 가담했음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성찰'이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