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우산 Sep 21. 2024

가훈을 정했다

말의 아우라를 믿어보기

가훈을 정했다. 가훈이라니, 요즘 시대에 구차하고 새삼스럽게 무슨... 하지만 결국 정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왜 가훈 따위를 정하게 된 걸까.


일의 시작은 사소했다. 최근 무언가 해내야 하는 프로젝트가 생겼고, 하지만 그 일을 해내는 건 도대체 불가능하게 생각되던 와중에 '포기할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 그런 무겁고도 어두운 느낌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저항이나 결심 같은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단지 스스로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는 마음같은 게 먹어지지 않았고(마음을 먹은 후 바로 몇 시간 뒤, 혹은 다음 날 여지없이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마음을 어렵게 먹는다 해도 실천을 시작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으며 실천한다 해도 그것을 지속하는 건 꽤나 고되고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상태의 연속 중 가장 어려운 순간은 역시 마음먹은 걸 행동으로 옮기는 그 찰나의 순간에 있었고, 그것을 미루면 미룰수록 행동을 시작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고 싫어진다는 원리를 알게 되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들은 말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아마도 법률스님이었던 것 같은데.., 혹은 아이돌 누구였던지도..), 해야 하는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 일을 '지금, 당장' 해버리는 것이라는...(아마도 이 말이 아이돌 누군가가 했던 말이었던 듯) 우리가 일과 관련하여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사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서 온다는...(이 말이 법륜스님이 했던 말이었던 듯..) 그래서 지금, 당장 하기 싫고 어려운 그 일을 시작하게 하는 어떤 추동력 혹은 강제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눈앞에 뭔가 써서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탄생한 '나를 움직이게 하는 말'이 탄생했고 그것을 가장 잘 보이는 거실의 거튼 옆에 붙여 놓았다.



별 것 아닌 말이지만, 눈앞에서 시각화되어 종이 위해 견고하게 새겨진(그것도 명조체로!) '글자'의 힘은 의외로 강력했다. 저걸 쳐다보는 일은 정말 곤욕스러웠지만(글자들은 거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좀처럼 그 글자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피할 수 없었고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글자들 앞에 굴복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들의 명령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이상한 마음'은 이상하게도 꽤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을 발휘했고 그렇게 말의 힘을 빌어 일들을 매일매일 조금씩 진척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말이 가진 힘, 특히 눈앞에서 매일 볼 수 있는 인쇄된 글자가 미치는 영향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인생의 방향이 될 만한 '좌우명'이나 '가훈'같은 걸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인생'이라고 하니 아무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정할 수는 없었고, 그 후로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과연 내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으로 삼아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라는 부담스럽고 어마어마한 질문을 품고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몇 가지 개념들과 문장들을 떠올리고 철회하고 수정하고 새로 떠올리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세 가지의 가훈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오랜 시간 숙고를 거쳐 '그래 이런 말들이면 되겠다' 싶은 결론에 이르렀고, 그래도 인쇄하지 않고 몇 주를 더 묵혀 두었다가 어느 날 무심코 인쇄해 거실 커튼에 붙여두었다. 붙여둔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이번에도 저 말들이 어떤 아우라를 뽐내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저 막연히 좋은 말들을 써붙여 놓은 것 같아 말의 힘을 잃고 그냥 글자 덩어리, 종이 조각이 되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생각하고 고민하고 다시 확신하는 시간을 거쳐왔기 때문에 그 말의 힘이 쉽사리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내가 저 말을 떠올릴 때의 마음 이상으로 어떤 힘이 되어 다시 나를 관통하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저 말들이 나에게 어떤 말을 걸어올지. 내 인생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다만 흘러가는 와중에도 저 말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그 의미를 곱씹어 실천에 옮겨보려는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Keep Going!


매거진의 이전글 손절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