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3
사람의 바닥을 보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바닥은 있을 것이지만, 다행히도 인간의 문명화된 사회의 질서와 예의는 그것을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막아준다. 그리고 우린 그 약속된 질서와 예의에 기대어 순조롭고도 유쾌하게 타인을 대하는 일상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상의 경험이 축적되어 가면, 대체적으로 우리는 타인에 대해 호의적인 시선과 안심할 수 있는 믿음을 부여하곤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주 가깝게 밀착되어 어떠한 공동의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만 않는다면, 쉽게 말해 '일'로 만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타인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며, 또 그러고 싶어 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긍정적인 기대를 품는다는 건 서로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서로에게 유익하다. 타인에게 호의를 갖는다는 건, 어쩌면 나를 위한 마음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좋은 감정과 긍정적 기대는 독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우선 그 '좋음'과 '긍정'의 경향이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질서와 예의의 체계에 의지해서 서로 거리를 둔 채 형성되어 온 것이며, 그렇다는 얘기는 그 좋음과 긍정의 기대란 것이 근거가 없거나, 혹은 과장되거나 오해에서 비롯된, 그야말로 나의 일방적인 나의 '기대'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기대'란 것은 매우 무너지기 쉬운, 토대가 불안정한 공든 탑과 같은 것이기 쉽다. 그리고 그 기대가 큰 만큼, 그것이 공들여 쌓은 탑인 만큼, 어떤 하나의 계기 또는 균열을 만나 일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까지 서로를 이어주던 그 호의적인 기대는 그 순간 관계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독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 파국의 효과는 그것을 쌓는데 들인 정성에 비례할 것이다.
사람의 바닥을 볼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인간관계에서 기대란 없을 수 없으며, 그 기대의 정도와 방향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어서,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공든 탑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 그 사람의 밑바닥이 환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그때까지 보아온 그 사람의 호의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에, 큰 충격과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너진 공든 탑이 아니라 그 무너짐 앞에서 취하는 그 사람의 태도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선과 악의 문제나, 도덕과 성격의 문제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바닥은 있고, 그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 또한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바닥과 바닥이 충돌할 때에는 대체적으로 파국으로 치닫기 마련일 것이다. 그것이 인간관계의 어려움이자 비극이며, 그것은 누가 어떤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탓할 문제만은 아니다. 우린 모두 다른 개체이고 다른 성격을 가진 서로에게 완전한 타자이기에,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지고 마는,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찾아오고 마는 비극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고 하여 모두가 파국을 맞는 것만도 아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운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런 경우 운이란 대체적으로 파국에 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때 파국으로 기우는 거칠고 무거운 중력을 버텨주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인격과 사랑이다. 그러니까 그 상대의 바닥을 보고도 '너 또한 바닥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연민할 줄 아는, 그리고 '나 또한 바닥을 가지고 있지'라고 성찰할 줄 아는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파국의 중력을 버텨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격은 단지 버텨줄 뿐, 그 중력을 이겨내며 무너지는 공든 탑을 다시 세울 수 있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그것은 상대와 나를 '이해'함으로써 붕괴의 가속도를 줄여주는 방지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파국의 중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중력에 상응하는 또 다른 상승하는 중력의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힘'은 곧 사랑이다.
우린 살면서, 그런 관계의 파국을 종종 겪는다. (겪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매우 운이 좋거나, 혹은 천성이 무덤덤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매우 훌륭한 인격과 강인한 사랑의 마음의 소유자일 것이다) 혹여 서로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관계는 파국을 맞는 것이, 혹은 그쪽으로 결론을 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 쌓인 관계라면,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추억이자 기억이고, 나눈 시절만큼 마음도 이어져 연결되어 있는 사이라면, 그 관계를 떼어내는 일은 아주아주 슬프고도 아픈 경험이 될 것이다. (흔히 연인 사이가 그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상대를 헤아릴 수 있는 이해의 그릇을 가진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 파국의 중력을 이겨낼 사랑의 힘을 가진 강한 사람이라면, 그 파국의 속도와 무게를 버티고 이겨내어, 다시 정성 들여 탑을 쌓아볼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쌓아진 탑은, 언제 바닥을 보이며 무너질지 모를 다른 일반적인 관계와 달리, 아주 강하고 튼튼하게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어려움과 상처를 딛고 쌓아 올리고 연결한 탑과 다리는 당신 인생의 수많은 시련과 불안의 순간을 버티고 이겨낼 수 있게 해 주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다.
당신에게는, 그런 다리가 있나요?
이 질문은 인생에서, 그 어떤 질문보다도 중요하고 필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겐 그 다리가 꼭 필요하다. 이건 단지, 마음의 안정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건강한 음식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하듯, 튼튼한 관계없이 우리는 인간답게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