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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Aug 01. 2015

거울세대 (1)

나는 인증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너무나 유명한 이 명제는, 합리적인 인간,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인간 존재의 의의를 함축한 말이다. 그리고 중세 시대 神에 종속되어 있던 인간을 해방하여 역사라는 무대에 주인공으로 위치시킨,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많은 비판과 수정을 겪으며 수난을 맞게 되는데, 가령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 자크 라캉은 데카르트의 명제에 빗대어 인간 존재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가만히 생각해보자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존재한다니. 인간이 동물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바로 사유 능력에 있을 텐데 그런 사유 능력이 인간의 존재 의의, 그러니까 인간다움에 별 쓸모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라캉은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사유보다는 욕망을 주창한다. 그러니까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정도가 되려나. 왠지 현대인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데카르트보다는 라캉의 시각이 더 설득적으로 느껴지는 건 단지 필자가 광고인이기 때문일까.


어찌됬든 그래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이 말의 의미는 라캉의 또 다른 유명한 명제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즉 그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을 규정짓는 바로 그 욕망이 대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것인데, 이 질문에 대한 라캉의 대답은 이렇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1901~1981)


아니 이건 또 뭔가. 나의 욕망이 내 것이 아니라니.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인간의 욕망은 순수하게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지만, 타자에게 보여 지고 있는(싶은) 나 자신에 대한 욕망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나에 대한 나의 욕망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오히려 그 시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나의 욕망은 타인의 시선 어딘가에 놓여 있는(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가상의 나를 향해 있다. 그래서 라캉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내 욕망이 낳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은 상상이라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 영화 '메트릭스'의 철학적 근간을 제공했던 현대 철학자 보들리야르는 미디어에 의해 가공된 가상의 세계를 현실과 닮은 '시뮬라시옹'이라 부르며, 시뮬라시옹이 현실보다 오히려 더 현실 같은 현실감을 준다는 의미에서 '과잉현실감(Hyper-Reality)'이라는 개념을 주창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인은 실제 현실보다 가상 현실의 과잉현실감에 더 몰입하고 민감하게 반응함에 따라 이 과잉현실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의미(기호)를 소비하는 데서 개인이 존재 의의를 찾는다고 말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들리야르 (1929~2007)


복잡한 철학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예를 들어 한번 얘기해 보자.


요즘 한창 '맛집' 프로그램이 인기다. 채널을 어디로 돌리나 TV 스크린 속의 연예인들은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최대한 맛나 보이게 먹는데 여념이 없다. 연신 뱉어내는 감탄사도 잊지 않는다. 보고 있으면 절로 침이 고이고 행여 식사라도 하던 중이었다면 내 앞의 음식은 음식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기 그지 없어 입에 넣기가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당장 숟가락을 내려 놓고 TV 속 저 곳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TV뿐만이 아니다 자려고 누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뒤적뒤적 들여다 보고 있으면, 온갖 먹방 사진이나 영상들이 스마트폰 위로 둥둥 떠나니고 친구들이 자랑 삼아 올려놓은 맛집 사진들까지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소외감마저 밀려 오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누워서는 곰곰이 '내일 뭐 먹지'하는 고민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 아니 욕망하다가 여기저기 포스트를 넘나들며 사람들의 맛집 탐방 체험담을 구경하기에 나선다.


그렇다. 이건 단지 '식욕'의 문제다. 하지만 식욕 '이상'의 욕망이기도 하다. 


맛집 프로그램은 언제든 있어 왔다. TV가 생겨나면서 요리, 맛집 프로그램은 꾸준히 생겨나고 그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요즘 들어 유난히 이렇게 전국적으로 맛집이 유행하고 인기를 끄는 데는 맛집이 단지 식욕을 해결하는 수단 이상의, 미디어에 의해 생산된 사회적 기호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미디어의 각종 맛집 프로그램, 일명 '먹방'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남에 따라 맛집 탐방이 유행이 되고 유행이 됨에 따라 맛집은 더 이상 단지 '맛'으로서만이 아닌 꼭 찾아봐야 하는, 사회적으로 공유된 기호가 되고, 기호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기호들은 디지털이라는 자발적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통해 다시 한번 끊임없이 재생되고 반복되고 확산되어 욕망의 크기를 기하급수적으로 배가 시켜 나간다. 급기야 흘러 넘친 욕망의 크기는 사람들의 실제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기호를 진짜 식욕으로 채웠다는 만족감을 증명하려는 수 많은 게시물들로 인해 또 다시 기호화-욕망의 순환이 확대 재생산된다.(최근 개봉한 영화 '아메리칸 셰프(Chef)'를 한번 보시라.)


영화 [아메리칸 셰프(Chef)] 중 한 장면


이런 현상은 맛집 프로그램 중 2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 '테이스티 로드(Tasty Road)'에서 가장 극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디지털에 익숙한 이들 세대들이야 말로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기호에 관심이 많고, 가장 핫한 아이템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다. 맛집은 트렌드에 편승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아이템 중 하나로서 소비되는데, 특정 맛집이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고 나면 1~2시간쯤 기다려야 하는 건 기본이지만 이들에게는 그 시간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건 단지 먹고 싶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직접 맛보는 만족감만큼이나 큰 만족감은 '인증'에서 온다.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유난히 그 비주얼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맛만큼이나 인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래 기다려 맛본 디저트의 맛을 기억하고 싶어서라면 그저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세대들에게 공유되지 않는 사진이란 무의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건 인증이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나의 경험. 그러니까 '나 득템 했어'라고 말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 테이스티 로드에서 핫한 언니들이 먹었던 따끈따끈한 이 디저트, 모두들 먹고 싶어 하는 이 아이템이 바로 내 앞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다.


이러한 인증 욕구는 단지 맛집 방문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카페엘 가도, 공원엘 가도, 페스티벌에 가도, 뮤지컬 공연장엘 가도, 해외 여행을 가도 인증은 그들에게 필수 의례다. 요즘 어딜 가든 손에 들려져 있는 셀카봉은 인증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반영하는 아이템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인증절차가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었을까? 왜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인증받으려 하는 걸까. 아마도 그건 나의 행복을 타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의 발로가 아닐까. 


인증샷을 통해 '나 행복해 보여?"라고 묻고 싶은 건 아닐까. 그러니까 '나'라는 기호를 타인의 시선에 놓고 욕망하고 있는 건 아닐까?


Olive TV 프로그램, [Tasty Road]


이쯤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은 인간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라지만, 요즘 같은 디지털 세대, 인증 세대에게 특히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들은 개인 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든 들고 다닐 수 있는 이 개인 미디어는 나를 공유의 세계에 끊임없이 접속할 수 있게 해 주며, 그렇다는 얘기는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 항상 불특정 다수인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이란 손 안에 쥘 수 있는 작은 기계지만 그 기계는 거대한 타인의 세계로 연결될 수 있는 차원관문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의 20대만큼 이 거대한 타인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나를 노출시키고 표현하고 몰입하는 세대가 또 있겠는가.  데카르트의 명제를 빌어 얘기하자면,


 나는 인증한다. 고로 존재한다.


쯤이 될 수도 있겠다.



※ 본 글은 한국광고총연합회에서 발간하는 [광고계 동향] 2015년 2월호 (Vol.287)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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