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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May 10. 2017

역사의 반복을 막는 길

선거의 승리가 삶의 승리는 아니다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친 공로자의 순서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선수, 최순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유라겠지. 인간의 모성애란 자신의 안위마저 뛰어넘는다. 비선의 존재 자체를 별 탈 없이 은닉해 오고 있었던 그 자에게 딸이 없었다면 공식적 노출은 아마도 힘들었으리라. 혹은 그 자가 그렇게 무식하게 해쳐먹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자의 무식함에 감사해야 할지도. 혹은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박근혜의 미성숙에도.


모든 것은 그 자의 딸로부터 시작되었다


두 번째 선수, 안타깝지만 세월호.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희생된 아이들과 그 유족들이겠지. 정치적 환멸과 이기주의에 젖은 이 나라 국민들에게 분노의 장작이 되어 춥고 긴 겨울을 지탱시켜준 건 그 아이들이었으리라. 그들이 아이들이었다는 점도 우리를 분노케 한 이유였음을 인정해야 하리라. 이 나라 보수의 만병통치 프레임이 되었던 지긋지긋한 종북좌빨 색깔론을 밀어낸 것도 그들이었음 또한.(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20%가 넘는 국민들이 이 색깔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실로 무서운 일이다.)


아이들의 희생 앞에 우리는 항상 숙연해진다


세 번째 선수, JTBC.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손석희. 위 두 사건을 전 사회적 아젠다로 터뜨리고 사람들의 입에 지속적으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언론.(다른 언론도 있겠지만 장악력이 약하고 색깔론에 취약하다) 망가져버린 이 나라 지상파 언론의 상황에서 JTBC, 그리고 스타 아나운서 손석희의 지명도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


최순실과 세월호를 집요하게 파고든 JTBC와 손석희


네 번째 선수, 국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촛불집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200~300만의 사람들. 춥고 길었던 그 시간들을 통과해 광장과 거리를 지켜낸 그들의 노고는 높히 치켜세울만하고 정치권과 사법부에 압박을 행사한 영향력은 분명 상당했지만, 한편으론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 정도도 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희망이 없는 국민이라는 오명을 쓸 뻔했다.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냉정하게 보면 그렇다.  


촛불은 춥고 길었던 시간들을 견뎌냈다


다섯 번째, 전체적으론 미미하지만 직접적인 선거 수치에는 큰 영향을 미친 공로자, 안철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보수가 이렇게 갈라져본 적이 있었던가. 보수는 언제나 무섭도록 똘똘 뭉쳐왔으며 그 지지기반 또한 막강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가 없었다면 충분히 양강 구도가 가능했을 것이며, 그랬을 경우 선거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이런 상황에서도 홍준표에게 던져진 표수를 생각해 보라) 아무런 신념도 철학도 없는 무색무취의 백치미로 부동표와 보수표를 가져가 준 그의 역할은 실로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봇처럼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그의 말투는 피처링.  


 그는 악수만을 골라 두었다


이렇게 순위를 매겨 놓고 보니 안타까운 건, 국민들의 역할이란 네 번째에 불과하다는 것. 이런 식의 내 맘대로 순위 매김에 발끈하고 욕할 사람들도 많겠지만, 사실 이런 정도의  자극적인 부정, 자극적인 사건, 자극적인 인물이 없었다면 그런 정도의 자극적인 분노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군중심리의 실체다. 그리고 우린 좋던 나쁘던 그런 군중심리의 실체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힘의 한 축이라 해도 말이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지만,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그 반복의 과정에서 점진적인 그리고 표면적인 환경 개선이 일어날 뿐. 가령 공식적인 노예가 사라진 건 환영할 만한 개선이지만, 여전히 노동자는 자본가의 노예로, 인간은 돈의 노예로 허덕이며 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노예적 삶이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반복된다.


나는 이런 역사의 반복에서 탈주하여 인간이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자극적인 사건에 대한 자극적인 분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지금의 성과를 일구어 낸 민중의 분노가 아무런 진보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처한 환경과 제도는 민중들의 분노와 혁명에 의해 역사적으로 꾸준히 개선되어 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 객관적 사실을 굳이 더해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인간의 인간적 삶을 위한 근본적 개선, 그러니까 노예적 삶에서 벗어나 다수를 대상으로 한 소수의 지배 상태를 혁파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사는 삶으로의 본질적 개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정도의 혁명적 개선이 가능하려면 경제 체제, 정치 제도, 행정 조직 같은 외부적 요인의 변화로는 뚜렷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역사를 살펴본다면 그 한계를 직시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외부적 요인의 변화로는 본질적인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혁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혁명을 나는 '자각'이라 말한다. 스스로 깨닫는 변화.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건 외부 환경의 제도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해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 하는 것이다. 외부에 무슨 일이 벌어져야만, 큰 사건이라도 생겨서 분노해야만 주먹을 불끈 쥐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 아닌(그런 일이 생기면 그래야 하겠지만) 아무런 사건도 뉴스도 없는 일상의 삶에서도 환경과 삶의 부조리를 스스로 인식하고 그것에 승복하며 살고 있는 스스로를 깨우치고, 나를 바꿀 수 있도록 스스로 실천하는 일.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최순실이나 박근혜 같은 저질의 인간이 저질러 놓은 똥을 치우는 일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똥을 치우는데 자족한다면 우리는 다시 반복되는 역사를 막을 수 없다. 이 세상의 저질 인간은 수도 없이 많으며 그런 저질 인간을 지속적으로 양산해 내는 환경에 우리는 처해 있다. 수 차례의 혁명과 100여 년의 세월 끝에 민주주의를 상식적인 사회 제도로 안착시킨 프랑스를 보라. 지구 상에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그 나라에서도 그런 저질 인간은 득세를 한다. 하물려 이 나라는 어떻겠는가. 결국 좀 더 지나지 않아 누군가는 또다시 똥을 싸 놓을 것이고 우리는 또다시 힘겹게 힘겹게 거리로 나가 아주 고되고 오랜 싸움 끝에 겨우 그 똥을 치우는데 또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어쩌면 치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노예의 일상으로 되돌아가 더 좋은 물건을 사고 남들보다 더 위에 서보이기 위한 경쟁에 나를 투신하고 채찍질할 것이다.

 

프랑스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대표 르펜, 무료 34%의 지지를 얻었다. 극우들은 항상 국기를 흔든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그토록 힘겹게 해 온 일이 미성숙한 저질 인간들이 싸질러놓은 똥을 치운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해 낸 이 위대해 보이는 승리가 사실은 '똥 치우는 일'이었다는 것을. 똥은 치워야 하겠지만, 우리는, 인간은, 나는 다만 똥 치우는데 만족하며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저질 인간들이 싸 놓은 똥을 치우는 일을 나는 혁명이라, 승리라 부르고 싶진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슬프기 때문이다.


혁명은 내가 노예로서 스스로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나 자신을 상대로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반복을 막는 진정한 혁명이자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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