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맛, 대화의 맛
4월이 다 지났다. 날씨도 이제는 살랑살랑 봄바람의 시원함을 지나 조금은 후끈한 여름의 태양이 그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다. 사람들의 손에도 어느새 따뜻한 아메리카노 대신 얼음이 송송 띄워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있다. 플라스틱 돔형 뚜껑 한가운데 뚫린 구멍에 두툼한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빨면 커피의 씁쓸함과 얼음의 시원함이 한꺼번에 입안에 들어오는 느낌에서 날씨를 실감하곤 한다.
'아 이제 곧 더워지겠구나' 하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여전히 따뜻한 커피가 좋다. 더워서 입에 댈 수 없을 정도의 여름 날씨가 되지 않고서야 여간해서는 아이스보단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찾는다. 괜한 고집일지 모르지만, 왠지 나로서는 '커피는 따뜻해야 커피지' 하는 편견을 버리지 못하겠다. 대체 그런 쓸데없는 고집을 왜 부리나 싶기도 하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자면 커피를 마신다기보다는 갈증을 채우기 위해 물을 마시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편의점에서 별생각 없이 물 대신 사는 녹차나 옥수수수염차를 마시는 것 같은, 그러니까 맛을 음미하기보단 그저 목을 축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커피를 그런 용도로 마신다는 게 왠지 아깝기도 하고 말이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해 힘쓴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생각해보면 다른 차는 안 그렇겠냐 싶지만. 역시 편견은 편견이다.
아무래도 그런 편견은 커피를 직접 내려 먹을 줄 알게 되면서부터 생긴 게 아닌가 싶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 불던 드립 커피 바람을 타고 나 또한 이런저런 기구들을 집에 사다 놓고 한동안 드립을 내려 먹던 시절이 있었다.(캡슐커피 머신이 등장한 이후, 드립은 연중 이벤트가 되어버렸지만) 처음에는 나도 드립 커피를 내려보겠다고 호기심 반 진지함 반으로 시도해 봤지만, 알면 알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복잡다단한 것이 그 전의 믹스 커피와는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원두라는 걸 접하고 신기해했던 단계부터, 원산지 별로 맛이 다르다 하여 이 지역 저 지역의 원두 맛을 구별해 보려고 했던 단계, 그라인더도 종류마다 다르고 얼마나 곱게 갈아내느냐에 따라 또 맛이 달라진다 하여 나름 이렇게 저렇게 맞춰보던 단계, 물을 내리는 방법도 기술이라고 하여 조심스럽게 손을 휘휘 저어 가면서 정성을 다해 커피를 내리던 단계... 커피 맛의 핵심은 로스팅과 신선도에 있다고 하여, 로스팅을 배우는 단계까지. 하지만 로스팅 단계에 진입하기 직전에 이르러서 나는 두 손을 들어버렸다.
'아, 뭐 커피 한잔 마시자는데 왜 이리 복잡해' 라며.
귀찮아서 그만둬버렸지만, 어떤 경험이든 허투루 지나가는 법은 없다. 나는 그때 이후로 커피를 대할 때면 왠지 함부로 마셔버려서는 안될 것 같은 경건함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후루룩 마셔버리게 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왠지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 유별난 조심성도 가지게 돼버렸다.(커피 맛을 구별하고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허세도 같이 갖게 돼버렸지만;;)
사실 난 커피 맛을 잘 모른다. 그저 씁쓸한 커피와 시큼한 커피 정도를 구별할 뿐. 그리고 이왕이면 씁쓸한 게 시큼한 것보다는 더 끌린다는 취향 정도. 그래서 시큼한 맛이 주로 강한 드립 방식보다는 씁쓸한 맛이 강조된 에스프레소 방식을 더 선호하곤 한다.(가끔 드립이 땡길 때도 있지만)
그런데 드립 커피를 한창 내려먹던 그 시절, 굉장히 맛났던 커피로 기억나는 경우가 한 번 있었다. 커피 맛을 잘 모르는 내가 느끼기에도 왠지 맛이 깊고 진하다랄까. 집에서 늘상 사용하던 그라인더와 드리퍼, 물을 사용했고 원두도 특별한 원산지도 아니었지만 달랐던 건 로스팅이었다. 친구가 집들이 선물로 사다준 커피였는데, 방금 갓 볶은 커피라고 했다. 놀라웠던 건 드립을 내리는 동안 부풀어지던 커피가루의 모양새였다. 금방 물이 내려가고 거품이 꺼지던 다른 원두와는 달리 커피 가루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품도 풍성하게 유지되었던 그 커피는 그야말로 맛이 '고급스러웠다'. 그때 그 커피를 마시며 로스팅을 배워야지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같이 떠오른다. 물론 그 뒤로 1초 만에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때 그 기억 때문인가, 요즘 커피 집을 가면 직접 로스팅을 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살펴보곤 한다. 그리고 로스팅 기계를 갖추고 있는 까페라면 왠지 신뢰가 가고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때론 커피 볶는 과정이 보일 때면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커피가 볶아지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흐뭇함 같은 감정이 밀려오곤 한다. 왜 내가 흐뭇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커피의 맛이라고 하면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카모메 식당]이라는 일본 영화인데, 커피에 관한 영화는 아니지만, 카모메 식당에서 파는 메인 메뉴도 커피는 아니지만(오니기리와 시나몬롤이 주메뉴다), 드립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비법에 대해 가르쳐 주는 장면이 잠깐 등장한다. 그리고 그 비법이란 건 황당하게도 '커피 루왁'이라고 주문을 외는 것이다. 원두가 루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커피 루왁: 사향 고양이의 배설물에서 커피 씨앗을 채취하여 만든 인도네시아 커피.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로 불린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비법은 주문을 외울 때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을 다해 주문을 외우면 마치 루왁 커피처럼 맛있어진다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주문이지만 왠지 그럴 듯한, 따뜻해지는 이야기다. 실제로 한번 해 본적이 있기도 한데, 놀랄 만큼 맛있어지지는 않았지만 왠지 좀 더 맛있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단지 커피의 맛이 아닌, 커피에 담은 마음과 그걸 마시는 상대의 마음이 아닐까 하고. 그래서 커피를 통해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그렇게 이어진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는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마음을 담은 맛있는 커피가 마음을 담은 맛있는 대화로 이어진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지 않을까.
가끔은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마음을 다해 내려 친구들에게 권하는 풍경을 상상해 보곤 한다. 뭔가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이 물씬 나는 이미지다. 깊고 진한 맛의 커피를 음미하며 마음 맞는 친구들과 별 시덥잖은 농담을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여유 있는 풍경.
그런 풍경에서라면 대화의 맛도 한층 더 깊고 따뜻하지 않을까.
행복이란 그런 사소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