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창조한 기타리스트
가수에게 자기만의 보이스 톤이 필요하듯 기타리스트 또한 자신만의 톤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목소리와 다르게 일렉기타의 톤은 다양한 이펙터들의 조합을 통해 기타리스트 스스로가 만들어 내야 한다. 부활의 김태원 또한 자신만의 기타 톤을 가지고 있는데, 엇박처럼 한 템포 느리게 그리고 왠지 힘겹게 밴딩 되며 '우.. 웅~'하고 등장하는 간주 첫 마디만 들어도 단번에 그의 연주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타 톤과 연주 스타일을 구축해 내었다. 세상엔 어마머마한 테크닉을 갖춘 기타리스트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자신만의 톤과 연주 스타일을 가진 기타리스트는 손에 꼽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얼마나 다르면서도 듣기 좋은 톤을 가졌느냐의 싸움에서 김태원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그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가 뛰어난 테크니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기타리스트인 이유다.
그래서 김태원이 기타를 잘 치지 못 치니 하는 싸움은 무의미하다. '기타를 잘 친다 = 뛰어난 테크닉 또는 속주'로 이해하고 있는 대부분의 소년들에게 김태원은 전설, 3대 기타리스트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도 형편없이 기타를 '못' 치는 기타리스트이다. 하긴 '잘 친다=테크닉'이라는 공식이라면 당연히 그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도, 3대 기타리스트도, 심지어 아마추어 중에서도 잘 친다고 보기 힘든 그저 그런 평범한 기타리스트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김태원을 숭상하는 이유는 단지 톤과 스타일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만의 멋진 톤과 스타일을 갖추고 있는 기타리스트 또한 국내외 어딜 가든 많다. 마치 잘생긴 배우라 해도 스크린 속에 그런 배우들은 널리고 널린 것처럼. 하지만 그 잘 생긴 배우가 어떤 연기를 펼치느냐를 말하자면 얘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김태원이 자신의 기타로 어떤 곡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로 말한다면 그건 얘기가 다르다.
다른 내노라 하는 기타리스트와 김태원이 구별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는 예능인으로 알려지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기타리스트이지만, 기타리스트로 알려지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뮤지션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아티스트다.
'어떤 뮤지션이든 자신만의 세계가 없겠냐'라고 묻는다면, 글쎄 세계를 구축하는 뮤지션은 그리 많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렇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음악, 예술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창작 아이디어, 감성과 표현 기술 등등 다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세계를 통찰하는 눈,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 그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의 생각과 창작과 표현의 과정이 집적되어 나타나는 것이 하나의 세계다.
김태원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이렇다. 처절한 외연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숭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거칠고 치열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 고요한 순수를 담고 있는 세계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사춘기 소년이랄까. 혹은 풍경에 비유하자면 이글거리는 태양이 저물어 온통 빨갛게 물든 노을이랄까.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그 위대함에 숭고함을 느끼고 그 평화로움에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 서정적인 풍경과도 같은. 강렬함과 고요함이 공존하는, 거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훌륭한 음악은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태원이 그리는 그림은 천둥 번개를 동반하며 무섭게 쏟아지는 소낙비를 창 안에서 바라볼 때의 시원함과도 같다. 혹은 거칠게 휘몰아치는 태풍 한 가운데 눈과도 같다. 그의 음악이 주는 감동이란 해가 지는 순간, 비가 쏟아지는 순간, 태풍 한 가운데 머무르는 순간, 그 찰나의 광경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울컥해지는 경험과도 같다. 왠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저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다.
아마도 절망 속에서 탄생한 희망이 주는 감격 같은 게 아닐까.
이렇게 풍경을 묘사하다 보니, 어쩐지 터너의 그림이 떠오른다. 터너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혼돈 너머에 어떤 의지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광풍 속에서도 살아남겠다는 의지, 그것은 곧 찾아올 고요한 바다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기에 아름답다. 혹은 아름다움을 그려내겠다는 의지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기에 그 의지는 작품만큼이나 또한 아름답다.
듣는 이 마다 감흥은 다르겠지만 내가 그의 음악에서, 그의 연주에서 느끼는 감흥은 그렇게 뜨거운 것이다. 그리고 그의 톤이, 그의 연주가, 그의 곡이 하나가 되어 궁극의 아름다운 세계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가 다른 어느 기타리스트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의 어떤 기타리스트도 그런 숭고하고 서정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것도 별로 대단치도 않은 테크닉으로 말이다. 그러니 음악은 이론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다. 이론과 기술 그 너머에 인간의 직관과 감성으로 잡아낼 수 있는 하나의 세계다. 그런 점에서 그의 톤은, 연주는, 곡은 하나의 완성된 세계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그는 기타리스트이자 아티스트다.
약의 힘을 빌어 완성한 부활 2집 [Remember]를 들어보면 그 강렬한 세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약의 힘을 빌렸으므로 다소 과장되거나 너무 암울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가만히 그 세계로 몰입해 들어가면 전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체험하는 기분이다. 그의 예민한 감수성과 그 감수성을 폭발시켜주는 부스터의 만남은 이렇게 하나의 세계로 탄생되었다.
그중에서 특히나, 영화 [Once upon a time in the west]의 영화음악이었던(엔리오 모리꼬네의 작품이다) 'Jill's Theme'을 편곡한 연주곡은 그 백미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모든 기타 연주곡 중에서 단연 최고로 뽑는 작품이면서 한번쯤 연주해 보았으면 하는 내 평생의 숙원으로 남아있는 곡이다. 김태원 특유의 단조와 장조를 넘나드는 드라마와 웅장한 스케일이 느껴지면서도 엔리오 모리꼬네의 서정적인 멜로디의 힘이 그의 연주를 통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실로 명 연주곡이다. 게다가 20대 초반 시절의 그였기에, 거기에 약 기운까지 더해져 테크닉 또한 엄청난 기교를 뽐낸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운 건 부활의 어떤 앨범을 들어도 1,2집만큼의 강렬함과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는 아쉬움인데, 최근에 다시 발견한 9집 [Over the Rainbow]는 전성기 때의 강렬함은 아니더라도 나이 든 뮤지션의 원숙미와 아티스트로서 시들지 않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명반이다. 게다가 새로 영입한 보컬 정단의 음색도 감상에 한 몫을 더한다. 특히 이 앨범은 이승철과의 재결합으로 탄생된 'Never Ending Story'의 성공 이후 다시 한번 (이승철 없이) '부활'로서의 재기를 꿈꾸던 때이므로 뮤지션으로서, 아티스트로서 그의 면모를 오랜만에 느껴볼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Rain'이라는 연주곡이 있는데 들어보면 그런 그의 야심을 짐작할 수 있다. 아주 오랜만에, 하나로 완성된 그의 세계, 아름다움으로 전율케 하는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서정적이고 고요한 진행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듯 시원하게 폭발하는 그의 연주가 실로 얼마만이던가. 그리고 울컥하는 그 느낌...
작년, 보컬 정동하가 탈퇴하여 밴드로서 '부활'의 입지가 또 다시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그는 언젠가 이런 멋진 앨범과 연주를 들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의 인터뷰 영상들을 보고 있자면, 음악이 곧 그이고, 그가 곧 음악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엄청난 고통과 힘겨움 속에 살아온 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로이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아름다운 음악을 토해낼 수 있다면 그 인생 또한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하는 부러움이 그치질 않는다...
최근 김태원이 10번째 보컬을 영입했다. 김동명이라는 친구인데 '불후의 명곡'에서 그와 함께한 무대를 볼 수 있다. 새 보컬이라니, 반가운 마음에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에 들어보았더니 이게 왠 걸, 정동하의 탈퇴가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사실 정동하는 그동안 부활을 거쳐간 보컬 중에서도 가장 부활답지 않은 보컬이었다. 김태원이 의도하는 숭고하고 순수한 느낌을 표현하기엔 그는 너무 기교파였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보컬, 김동명은 그야말로 부활의 원색을 다시 부활케 할 친구임이 분명했다. 수줍지만 강한 에너지. 조용하지만 폭발력 있는 성량, 맑고 청량한 음색...
부활은 다시 부활이 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jHOxwaBN0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