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머스(Plymouth)로 가는 길에 프로비던스 공항에 있는 렌터카 회사를 방문해 차를 교환했다. 처음엔 엔진오일 교환 경고등이 들어왔는지에 대한 간단한 질문만 하더니, 6000마일을 넘게 운전했고 지금부터 시애틀까지 다시 6천마일을 갈 예정이라 하니, 그제서야 정색을 하며 차를 교환하는 게 좋겠다고 바로 차를 바꿔준다. 동일한 차종인데, 색깔이 다르고 번호판도 애리조나에서 뉴저지로 바뀌었다. 차가 바뀌고 나니 이제 다시 출발하는 기분이다. 그 동안은 서에서 동으로, 이제부터는 동에서 서로.
플리머스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이 상륙한 지점이다. 그동안 코로나도와 데소토의 미국 탐사로 시작해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인의 정착지인 세인트오거스틴, 영국인들 최초 정착지였다가 사라진 로아노크, 그리고 성공한 최초의 정착지였던 제임스타운을 방문하면서 역사를 살펴보았다. 사실 청교도(Pilgrim)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의 플리머스 상륙은 이들 사건들 보다 한참 뒤의 얘기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에게 플리머스와 청교도들의 정착은 마치 미국 건국의 상징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1620년 12월, 청교도들이 메사추세츠 해안가에 도착해서 상륙할 지점을 찾고 있던 중 정착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나타난다. 이곳은 해안사주로 둘러싸여 안전한 항구가 확보되어 있었고, 맑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고 있었으며, 더구나 다른 지역과 달리 해안가 인근에 나무들이 다 정리가 되어 있어 곧 바로 주거지를 지을 수 있었다.
원래 이곳은 파툭셋(Patuxet)이라는 원주민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왔었던 유럽인 선원들을 통해 퍼진 전염병으로 원주민들은 몰살되고 마을은 버려진 상태여서(day 24참조) 청교도들은 원주민들과의 마찰 없이 손쉽게 터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플리머스의 정착민들이 끔찍했던 첫 해 겨울을 견뎌낸 이듬해 봄, 한 원주민이 나타나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사모셋(Samoset)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는 이전에 영국선원들과의 접촉으로 영어를 배웠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또 한 명의 영어를 하는 원주민이 나타나는데 그가 티스콴텀(Tisquantum)이다.
그는 6년전에 유럽선원에게 붙잡혀서 노예로 끌려갔다가 스페인과 영국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와보니 자신의 고향인 파툭셋 주민들이 전염병으로 몰살된 이후였다. 갈 데가 없었던 티스콴텀(정착민들은 이를 스콴토라는 약칭으로 부름)은 정착민들과 함께 지내며 현지에서 농사짓는 법, 물고기 잡는 법 등을 가르쳐줘서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메이플라워호 이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유럽인들은 전염병을 옮기고 노예를 잡아감으로써 의도치않게 청교도들에게 삶을 터전과 조력자를 마련해 준 셈이다. 청교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이 도우신 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플리머스에 들어서니 거리마다 400주년을 기념하는 깃발이 붙어있다. 가만 따져보니, 2020년이 청교도들이 이곳에 상륙한지 400년이 되는 해가 된다. 내년에는 정말 대단한 행사가 벌어질 듯 하다.
우선 플리머스 방문객 센터를 방문해서 정보를 좀 얻기로 한다. 앞서 로아노크나 제임스타운의 경우 원래 정착지는 소멸되어서 현재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중이였고 국립공원서비스(NPS)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근에 정착지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별도의 관광지가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플리머스의 경우, 원 정착지 자체가 그대로 현재까지 마을을 유지하고 있기에 별도의 유적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에 플리머스락(Plymouth Rock – 플리머스 바위)이 이곳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어 있다.
기념관 하단 수면 위로 플리머스락이 위치해 있다
플리머스락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바위’라고 알려지게 되어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그 진행 과정이 흥미롭다. 1620년에 처음 이곳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기록 어디에도 이들이 미국 땅에 도착했을 때 첫발을 디딘 바위에 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플리머스 해안의 중심부에 마치 하나의 신전처럼 만들어진 건축물 아래에서 바위돌 하나가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플리머스락 안내문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아내가 빨리 오란다. 가이드인 듯 보이는 사람이 플리머스락에 대한 설명을 막 시작하고 있는 참이었다.
메이플라워 도착 후 120년이 지난 1741년에 플리머스시는 부두를 새로 건설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 94세인 폰세(Faunce)라는 노인이 해당 부두터에 자리잡은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이곳이 메이플라워호에서 내린 청교도들이 처음 디딘 바위라는 얘기를 본인의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그 바위가 부두 건설로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 노인의 아버지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최초의 일행은 아니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플리머스에 도착한 사람이었다. 즉, 그의 아버지도 직접 목격한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당시에는 폰세 할아버지의 언급은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 여겨졌다.
그렇게 또 한참의 세월이 흐른 1769년.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영국의 착취에 대한 정착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어느 날 이곳 교회에서 목사님이 플리머스락에 대한 설교를 한다. ‘150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영국의 제임스왕과 성공회의 폭압을 견디다 못해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왔는데, 이곳에서 또 다시 영국에 시달리게 된다면 우리 선조들의 그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 선조들이 저 플리머스락에 발을 디디던 그 정신을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 라고.
이렇게 해서, 당시 영국에 맞서서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을 하나로 뭉치게 해 줄 어떤 상징물을 찾던 이들에게 플리머스락은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하나의 상징물로 등장하게 된다. 주민들은 이 바위의 윗부분을 잘라 30마리의 황소가 이끄는 수레에 싣어 마을 광장으로 옮겨 놓고 독립정신을 고양하게 되는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의 조각을 기념품으로 가져가려고 훼손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러자 결국에는 다시 원래 장소로 가져와 지붕과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20년 전에 어느 90대 노인이, 자신의 아버지가 전해들은 얘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준 적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그냥 평범한 하나의 바위를 미국 독립정신의 상징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힘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 상징물이 큰 역할을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열성적으로 바위에 대해 설명을 해 준 가이드는 제임스타운에 대한 언급도 한다. 남북전쟁 이전만 해도 미국 건국의 시조와 같은 개념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는데, 북부지역(특히 인구대비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메사추세츠주)의 입장에서 남부연합 지역인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최초의 정착지로 부각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서 제임스타운은 정착초기의 여러 가지 부정적 이슈들(게으름, 내부반목, 원주민 충돌, 인육섭취 등 – day 20, 21 참조)로 인해 이들이 지향하는 미국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플리머스와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을 미국 건국의 선조로 부각시켰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혹시 여기에 버지니아에서 온 사람이 없길 바란다고 너스레를 떤다.
플리머스락 인근에는 이들 청교도들을 이끌어 성공적으로 정착지를 유지시킨 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의 동상이 서 있다. 그리고 그 뒤편의 언덕 위에는 청교도들이 도착한 첫 해에 사망한 정착민들의 명단이 적힌 비석이 위치해 있다. 당시 사망자들을 지금은 콜스힐(Cole’s Hill)이라 불리는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명단을 보면, 여자들의 경우에 ‘누구의 와이프’와 같은 식으로 별도의 이름 없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띈다. 당시 여성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란 생각이 든다.
첫 해 사망한 정착민 명단 비석
콜스힐 옆으로 ‘영국인들의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이라는 레이든(Leyden) 스트리트가 있다. 레이든은 청교도들이 출항한 네덜란드의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영국인들의 미국(British America)에서 가장 오래된’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그냥 미국이라고 하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아쿠마(day 8)나 타오스(day 10) 푸에블로처럼 800여년 된 미국 인디언 마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스페인인들이 건설한 세인트오거스틴(day18) 또한 플리머스를 앞선다.
레이든 스트리트는 첫 번째 거리(First Street)라고도 불리는데, 현재의 집들은 원래의 것은 없고 모두 그 이후 재건된 상태이다. 각 건물들에는 원래 1620년 식민지 정착 당시 무슨 자리였고, 지금 건물은 언제 지어졌다는 식으로 설명이 붙어있다. 그리고 플리머스 정착지의 원래 모습을 복원한 마을(Plymouth Plantation)이 인근에서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레이든 스트리트(first street) 전경
이곳에서 인디언 관련한 장소 세 곳을 발견했다. 우선 첫 번째는 콜스힐에 자리잡은 마사소잇(Massasoit)의 동상이다. 그는 플리머스 인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왐파노그(Wampanoag)부족의 추장이었는데, 플리머스 정착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릴 때 식량을 제공하고, 이후 인근 호전적인 부족들의 공격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 주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플리머스 식민지의 성공에 기여한 바가 크다.
마사소잇 추장의 동상
그 옆에는 조그마한 동판이 하나 서 있는데, 전국 애도의 날(National day of Mourning)이라고 제목이 붙어있다.
1970년 청교도 도착 350주년 기념식이 열리던 플리머스의 마사소잇 동상 옆에서 일련의 인디언 그룹이 미국인들의 추수감사절 축하 행사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다. 청교도들의 상륙은 원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수백만 동족들이 학살당하고, 땅을 빼앗기고, 문화와 전통을 말살 당하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매년 추수감사절에 이들은 이곳에서 애도의 시간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플리머스시는 이들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이곳에 동판을 세운 것이다.
잘못에 대한 사과와 인정이라는 이들의 자세를 보며 이와 대비되는 한일관계가 떠올라 씁쓸하다. 유럽인들의 상륙으로 원주민들의 문명화가 시작되었고, 원주민 토지는 모두 합법적인 조약 체결을 통해 확보하였다는 식의 주장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국 애도의 날을 기리는 동판
콜스힐에서 레이든 스트리트를 따라 마을 광장으로 이동하면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밑에 메타콤(Metacomet) 필립왕(King Philip)을 설명하는 동판이 하나 서 있다.
메타콤은 플리머스 정착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마사소잇 추장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이어 추장 자리에 오르는데, 당시 왐파노그 부족은 확장하는 백인들의 식민지로 인해 땅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기독교 강요로 인한 원주민 전통사회 체제의 위협, 그리고 원주민과 정착민간의 갈등 해결에 있어서 일방적인 정착민 방식의 강요(백인들의 갈등 해결법은 법과 규정을 근거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라면, 인디언의 방식은 갈등 당사자간의 화해를 궁극의 목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전 공동체가 함께 최선의 방법을 찾아가는 방식이다)등으로 불만이 폭증하고 있었다.
그는 오랜 기간 부족간 갈등관계에 있었던 인근 나라간셋(Narragansett)부족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식민지의 정착민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은 필립왕 전쟁(King Philip’s War)으로 불리는데, 결국은 영국인 및 이들과 연합한 인디언 부족들에게 패하고 필립왕은 전사하고 만다.
메타콤 필립왕 관련 기록 동판
동판에는, 그의 머리가 잘려서 꼬챙이에 꽂힌 채로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전시되었고, 두 팔은 잘려서 하나는 보스턴, 하나는 영국으로 보내졌다고, 그리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노예로 팔려갔다고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마을에서 너무도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Providence)이다. 딸아이가 다니는 대학교가 있는 곳이다. 방학 동안 인턴을 하느라 워싱턴에서 지내던 딸 아이의 짐을 학기 시작 전에 학교 근처 집으로 옮겨다 주어야 했다. 단 둘이 여정을 시작했던 우리가 이 대장정용 차량으로 미니밴을 골랐던 이유도 이삿짐을 나르기 위해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차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차가 조금은 가벼워질 듯 하다.
딸 아이가 자기 동네에 왔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카페와 맛집을 데리고 간다. 대학가 분위기는 왠지 모를 낭만이 남아있다. 잠시 우리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옛 추억에 잠긴다. 워싱턴에서 생색만 내고 계산은 하지 않았던(못했던) 딸 아이가 여기서는 진짜로 저녁을 대접했다. 워싱턴보다 몇 배나 맛있는 저녁이었다. 진짜로!
내일은 피쾃(Pequot)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한 후 북쪽으로 이동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스프링필드(Springfield)라는 곳에서 숙박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