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향한 출발에 앞서 마지막으로 대서양 해안에서 해산물을 한번 더 먹고 가기로 했다. 역시 해산물 맛은 신선함이다.
오늘 방문 예정인 피쾃(Pequot)부족 박물관에 가기 전, 이들 부족이 대량 학살을 당한 현장도 살필 겸 미스틱 항구(Mystic Seaport)로 향했다. 가는 길에 두 곳의 방문객 센터를 들렀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캔자스에 있던 샌드크릭 학살터(day 11)의 경우 국립공원서비스(NPS)에서 직접 관리하고 가이드 투어까지 해주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이 학살당한 이 곳은 지역 방문객 센터에서조차 모르다니 당황스러웠다. 샌드크릭의 경우 그 가해자가 미군인 반면, 미스틱은 미국의 건국 이전 영국인 정착민들이 가해자였던 것이 그 차이일까? 하지만, 이들 정착민들도 지금 미국인들의 선조임에는 차이가 없다.
마샨터켓 피쾃 박물관(Mashantucket Pequot Museum)은 매우 멋진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폭스우드 카지노를 운영하는 부족의 재력을 보여주는 듯 하다(2007년 오클라호마주의 치카소족이 윈스타(WinStar) 카지노를 세우기 전까지는 가장 큰 카지노였음). 입장료는 20불로 싸지는 않지만 미스틱 방문객 센터에서 받은 쿠폰으로 2불을 할인받았다. 두 곳의 방문객 센터를 들러서 얻은 유일한 수확이다.
박물관 로비에는 거대한 덕아웃(dug out) 카누가 전시되어 있다. 당시 인디언들이 통나무 속을 파내어 카누를 만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하긴, 시위족은 전 부족원이 사슴가죽을 싣고 영국을 향해 항해를 나갈 정도였으니(day 18), 큰 나무만 구한다면 덕아웃 카누의 크기도 충분히 커질 수 있겠다 싶다.
우선 피쾃전쟁에 관한 영화를 시청했다. 나름 극영화의 형태를 갖추고 재미있게 만들었다. 이제껏 방문했던 박물관이나 방문객센터에서 보았던 영상물 중에서 가장 나았던 것 같다.
피쾃부족은 지금의 코넷티컷(Connecticut) 지방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다. 1620년의 플리머스(Plymouth) 식민지 건립 이후 영국인들은 지금의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지역으로 식민지를 확장하여 왔고, 네덜란드는 1625년에 맨해탄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뉴욕으로 진출했다. 이 두 지역 사이에 끼어있는 곳이 코넷티컷이다. 코넷티컷 지역에는 피쾃부족 외에 모히간(Mohegan)부족과 나라간셋(Narragansett)부족이 주요 세력이었는데, 이 중에서 해안가를 주로 차지하고 있던 피쾃부족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피쾃부족(보라색영역)에 대한 영국군의 공격로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 식민지의 가장 큰 사업은 북쪽에 거주하는 이로쿼아(Iroquois) 부족연맹의 모피를 얻는 것이었고, 이러한 교역에 있어 왐품(Wampum)이라고 하는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이 화폐로써의 역할을 했다. 해안가를 장악하고 있던 피쾃부족은 왐품의 주요 공급처였고, 이들 식민지들과의 왐품 교역을 통해 번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피쾃부족도 다양한 전염병으로 타격을 받고 많은 마을들이 버려지게 된다. 메사추세츠 지방의 영국인들이 남쪽으로 확장을 하면서 피쾃부족과의 갈등도 커지는데, 이 와중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피쾃부족민을 살해하고, 한 영국 상인이 피쾃부족에게 보복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국인들은 피쾃부족에게 살인범과 보상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이들이 거절하자, 인근의 피쾃마을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살해한다. 이에 피쾃부족이 다른 영국 정착민 마을을 보복 공격하게 되면서, 결국 영국식민지는 피쾃부족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당시 코넷티컷 지역의 유럽 정착민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들은 피쾃부족과 적대관계에 있는 모히간족과 나라간셋족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공동 작전의 대가는 피쾃부족이 누리던 영국과의 교역권과 전쟁으로 잡게 되는 포로를 이 두 부족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1637년 5월 26일 새벽을 틈타 영국과 인디언 연합부대는 미스틱강 인근에 있던 피쾃부족의 핵심마을을 기습하여 포위 공격하고, 마을에 불을 질러 600명이 넘는 피쾃부족민이 살해되고 만다. 부족의 주력 마을이 이 전투로 붕괴된 후, 피쾃부족의 다른 마을들도 잇따라 공격을 받게 되고, 대추장이었던 사사쿠스(Sassacus)는 모호크(Mohawk)족의 영토로 피신하지만 결국 이들에 의해 살해된다.
모호크족은 사사쿠스의 머리를 잘라 영국군에게 우호의 표시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피쾃 유민들은 결국 항복을 하고, 1638년 9월 하트포드조약(Treaty of Hartford)으로 전쟁이 종결된다. 피쾃부족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던 영국은 이 조약을 통해 모든 피쾃부족의 땅을 몰수하고 유민들을 모히간족과 나라간셋족에게 넘겨준다. 또한 향후 영구적으로 피쾃부족의 이름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박물관 관람을 시작하는데 전시물의 규모가 정말 대단하다. 당시 피쾃부족 마을과 생활상을 넓은 공간에 실물크기로 리얼하게 꾸며놓았다. 재현된 마을 사이로 다니면서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사냥감을 다듬는 장면이라든지 가옥 내부의 모습 등을 아주 디테일하게 구현해 놓은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인디언 마을을 걸어 다니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곳은 피쾃부족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서 여러 북미 인디언 부족들의 다양한 탄생설화를 소개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발굴자료 소개 등을 별도의 전시관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다양한 탄생 설화들을 보니, 주니부족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Day 5). 그곳 원주민 가이드는 자신들 부족은 땅속에서 틈(그랜드 캐년)을 타고 올라왔다는 탄생설화를 믿고 있으며, 시베리아에서 이동해 온 인디언들은 아마도 아파치나 나바호족일 거라고 얘기했었다.
또다른 전시관에는 빙하기 시대 선조들의 생활상을 실물크기의 재현물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워싱턴에서부터 합류한 딸 아이도 자신의 첫 인디언 탐사여행 방문지에 매우 만족해 하며 흥미있게 구경하는데,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처음부터 너무 기대수준이 높아질까봐 걱정이야’. 사실 그 동안 우리가 방문했던 인디언 부족이 운영하는 박물관 중 이런 정도의 박물관은 없었다.
관람하다 보니, 이렇게 몰락한 피쾃부족이 어떻게 폭스우드와 같은 큰 카지노를 운영하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는데, 다음 전시물에서 의문이 해소되었다. 인근 부족의 휘하로 편입되고 이름도 못쓰게 된 피쾃부족민들은 궁핍한 처지에서도 부족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려 노력하며 살아왔고, 결국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적인 부족의 지위를 다시 확보하게 된다. 다만, 모히간부족으로 편입되었던 피쾃족은 마샨터켓(Mashantucket) 피쾃으로, 나라간셋부족으로 편입되었던 피쾃족은 포카턱(Pawcatuck) 피쾃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이후 이들 부족의 땅은 식민지 정부, 그리고 미국독립 후에는 코넷티컷주에 의해 지속적으로 줄어들게 되는데, 생활이 어려워지자 많은 부족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보호구역을 떠나게 된다. 그 결과 1920년 인구조사 당시 마샨터켓 피쾃부족민은 불과 6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단지 3명의 여인들만이 보호구역내에 거주하면서 부족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다시 한 번 소멸위기에 처해 있던 피쾃부족은 1970년대에 미국 정부가 인디언 주권을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마침내 피쾃부족도 연방정부로부터 자치권을 가진 부족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코넷티컷주를 상대로 부당하게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오게 되고, 결국은 1992년에 당시 기준 미국 최대규모의 카지노까지 세우게 된다. 현재 부족민의 숫자가 1천여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인당 기준으로 볼 때 미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원주민 부족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피쾃박물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폭스우드 카지노 전경
여기서 잠깐 인디언 부족들의 카지노 운영이 어떻게 활성화되었는지 살펴보자.
1970년대에 미네소타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거주하던 인디언이 자신에게 재산세를 부과한 주정부를 상대로 연방대법원에 상고를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연방대법원은 1832년 대법원 판례(체로키부족이 조지아주의 강제이주 명령에 맞서 제기한 소송에서 당시 연방대법원은 주정부는 인디언 부족에 대한 관할권이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이러한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강제이주를 실행하고 만다)를 근거로 인디언 보호구역에 대한 주정부의 재산세 부과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데, 주정부의 관할권 중에는 재산세 부과권 외에 카지노 운영허가권이 있었다. 이 점을 간파한 일부 인디언 부족들이 카지노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를 규제하고자 했던 주정부들이 법원에서 같은 사유(인디언 보호구역에 대해 주정부는 관할권 없음)로 패소하면서 많은 부족들이 카지노를 설립하여 부족의 재정확보에 나서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카지노가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산칼로스 아파치의 경우, 그다지 크지 않은 카지노의 방문객 대부분은 원주민들로 보였다. 하지만 대도시 인근의 위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폭스우드에 최대규모의 카지노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뉴욕과 보스턴 같은 대도시 인근이라는 입지가 큰 몫을 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건, 피쾃부족의 인근에 위치한 모히간 부족도 1996년에 모히간선(Mohegan Sun)이라는 카지노를 열었는데, 규모는 폭스우드에 미치지 못하지만, 나중에 지어진 시설인만큼 좀 더 고급스런 모습으로 차별화하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오랜 기간동안 서로 싸워왔던 이웃부족인 피쾃과 모히간은 이제 사업으로 경쟁하고 있는 사이가 되었다.
박물관을 떠나기 전에, 안내인에게 피쾃부족이 학살당했던 미스틱 마을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곳에 가볼 수는 있다고 하는데 본인도 자세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단다. 내 이메일 주소를 남겨두면 자신이 전문가를 통해 알려줄 수 있도록 하겠단다. 내일을 기다려보자.
오늘밤 숙박지인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로 떠나기 전, 잠시 폭스우드 카지노를 방문하여 우리의 행운을 테스트해 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수중의 돈은 금방 떨어졌다.
내일 일정은 뉴욕주 북부 지역인데, 구체적 방문지는 아직 미정이다. 지난 26일간의 여행 동안 없었던 상황이다. 원래 여행 계획상 방문하고자 했던 2개의 지역 외에 새롭게 가보고 싶은 곳이 나타났다. 하지만 내일 예약된 숙소까지의 거리를 감안할 때, 이 장소들을 다 방문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 뉴욕주 북부 지역의 강성한 부족이었던 이로쿼아부족 박물관은 반드시 들러야 할 것 같고, 미국 땅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영국간 전쟁의 격전지와 미국 독립전쟁 중 발생한 영국과 식민지간의 격전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듯싶다. 백인들간의 전쟁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인디언 부족들이 이들 전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뭔가 절충이 필요할 듯싶다. 오늘 밤도 일이 많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