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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o Lee Dec 06. 2019

Day 28 라스트 모히칸, 허구 혹은 사실?

윌리엄 헨리 요새(Fort William Henry)와 이로쿼아 뮤지엄


어제밤 고민 끝에 원래 계획을 변경해서 오늘의 행선지를 윌리엄 헨리 요새(Fort William Henry)로 정했다. 내가 매우 좋아했던 영화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의 영향이 컸다.  


1992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1756년부터 유럽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의 일환으로 북미대륙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 불림)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1757년에 프랑스의 몽캄(Montcalm)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인디언 부족 연합군이, 먼로(Munro)장군 지휘하에 있던 영국군의 윌리엄 헨리 요새를 포위한다.


영화는 모히칸부족과 함께 자란 백인 청년(다니엘 데이 루이스)과 그를 키워준 모히칸족 아버지와 동생이, 먼로장군의 딸들을 윌리엄 헨리 요새의 먼로장군에게 데려다주는 행렬에 합류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의 스토리뿐 아니라 배경영상 및 음악까지도 너무 훌륭했다. 예전에 이 영화를 보면서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않고, 각각 프랑스와 영국편이 되어 치열하게 싸우는 상황에 혼란스러웠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었던 기억이 난다.

요새가 있는 레이크 조지(Lake George)는 뉴욕주 주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여름 휴가지이다. 윌리엄 헨리 요

새는 프랑스군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1755년에 만들어졌는데, 프랑스군에 점령된 후 파괴된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다가 1950년대에 과거의 모습대로 재건되어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1시 15분에 시작하는 가이드와의 대화시간에 맞추기 위해 숙소에서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요새까지 서둘러 달렸다. 요새에 입장하니 당시 영국군 또는 민병대 복장을 한 가이드들이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선 영화 얘기를 꺼내고 그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는지를 질문했는데, 영국군 복장을 하고 있는 젊은 가이드가 기다렸다는 듯 영화와 관련된 얘기를 줄줄 늘어놓는다.

 

‘영화 촬영은 노스캐롤라이나 애쉬빌에서 이루어졌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곳 요새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지만,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 철수하는 영국군들을 인디언들이 공격할 때 영국군이 총을 쏘며 대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은 이와 다르다. 당시 항복조건이 ‘무기는 휴대하지만 화약은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영국군은 총을 쏠 수 없었다. 또한 그 전투에서 프랑스측 인디언이 먼로장군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먼로장군은 거기서 죽지 않았다. 그는 무사히 귀환한 후 알바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먼로장군에게는 딸이 없었고, 아들만 하나 있었다. 등등’

나의 두 번째 질문은 모히칸족에 대한 것이었다. 모호크(Mohawk)족과 모히간(Mohegan)족은 알고 있는데, 모히칸(Mohican)족은 이들과 다른 것인가? 여기에 대한 설명은 당시 코넷티컷 정착민의 민병대 복장을 하고 있는 덩치 좀 있는 가이드가 담당한다. 그는 자신을 인디언 전문가라고 한다.

 

‘모호크, 모히간과 모히칸은 서로 다른 부족이다. 모호크족은 이로쿼아 동맹의 한 부족으로 뉴욕주 북부에 거주, 모히간족은 코넷티컷 지역 거주, 그리고 모히칸족(마히칸족이라고도 불림)은 이들 지역의 중간쯤인 뉴욕주 중부와 메사추세츠주 지역에 거주했다. 하지만 현재 모히칸족은 모두 서쪽으로 쫓겨나서 위스콘신주의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다’.


그럼 여기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 불리는 북미 대륙에서의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에 대해서 좀 살펴보자.  


1700년대 중반 당시 북미대륙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3개국의 각축장이었다. 영국은 뉴잉글랜드부터 사우스캐롤라이나까지 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프랑스는 북으로는 캐나다와 오대호 지방, 그리고 서쪽으로는 미시시피강을 따라 오하이오부터 루지애나까지 영국 식민지를 둘러싸는 광할한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남쪽의 스페인과  서쪽의 뉴멕시코 지역을 차지했다.

1700년대 중반의 북미 식민지 지도. 붉은 색이 영국, 푸른색이 프랑스, 초록색이 스페인의 식민지를 나타낸다. 짙은 색은 정착지, 옅은 색은 영향권을 의미

영국 식민지에 거주하던 정착민들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을 시도하였고, 이는 해당 지역의 관할권을 주장하던 프랑스와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만다. 당시 영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조지 워싱턴이 프랑스군을 선제 공격하고, 이후 반격하는 프랑스군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유럽의 7년 전쟁 발발에 앞서 북미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프랑스와 영국은 유럽에서의 전쟁에 주력하느라 이곳 식민지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고, 본국에서 파견된 정규군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식민지에서는 정착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와 인디언 부족들을 동원하여 전투가 치러졌다. 인디언 부족들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계에 따라 각각 프랑스 혹은 영국군에 합류하여 전투에 참여했는데, 오대호 인근에 거주하던 많은 부족(주로 휴론족으로 대표되는 알곤퀸계 부족들)은 프랑스편에 가담했고, 단지 모호크족만 영국군에 합류한다.


당시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는 주로 원주민들과의 교역(주로 모피) 중심이었기에 정착민의 수는 수 만에 불과했고, 원주민들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던 반면, 영국 식민지는 경제적, 종교적 어려움을 피하는 유럽 이주민들의 정착지로 형성되고 있었기에 인구수도 이미 1백만명을 넘어서고 있었고, 토지약탈의 대상이 되었던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나쁜 상황이었다. 따라서 프랑스군은 인디언 연합군의 도움이 매우 중요했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공세를 펼쳤으나 프랑스의 몽캄 장군이 도착한 이후 프랑스군이 거세게 반격을 시작하는데, 그 전선에 윌리엄 헨리 요새가 있었다. 당시 요새를 지키고 있던 영국군 및 그 연합병력의 규모는 2천명 가량이었는데 비해, 이를 포위한 프랑스 연합병력은 8천명 가량으로 영국군은 수적 열세에 놓였다.

 

8월 3일부터 시작된 프랑스군의 포위공격에 영국군은 계속 저항했으나 대포가 부서지기 시작하고, 요새 전역이 프랑스군 화포의 사정거리에 놓일 정도로 포위망이 좁혀지자 결국 8월 9일 항복한다. 우리가 방문한 날이 마침 8월 8일이었는데, ‘내일’ 요새 항복 362주년을 맞이하여 정오부터 행사가 있단다. 우린 하루 차이로 이 장면을 놓치게 되었다(제임스타운에서는 하루 차이로 대통령 방문행사를 놓쳤었는데(day 20), 언젠가는 이벤트를 딱 맞추는 순간이 있겠지).


당시 몽캄 장군은 영국군에게 매우 관대한 항복조건을 제시하는데, 전 영국군과 인디언 병력이 자신들의 무기를 지닌 채로(화약은 압수) 후방에 있는 영국군 진지로 퇴거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것으로, 조건은 단 하나, 향후 18개월간 프랑스군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프랑스군과의 연합작전에 참여했던 다수의 인디언 부족은 전투를 통한 노획물(포로와 전리품) 획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영국군과 인디언 전원이 소지품을 가진 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면 노획물이 없어지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영국군들이 철수하면서 요새에 남겨진 부상병들을 살해한 후 철수하는 영국군을 뒤쫓아가서 습격한다. 이를 ‘윌리엄 헨리 요새 학살(Massacre of Fort William Henry)’이라고 부른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이겼지만, 이 전투로 인해 영국은 미국 식민지에서 승기를 잡는 전기를 만들게 된다. 첫 번째 이유는, 몽캄장군의 관대한 양보로 실망한 인디언 부족들이 더 이상 프랑스군을 도와 전쟁에 참여할 동기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영국이 학살사건을 과대 포장하여 당시 식민지 정착민들에게 공포감을 불어 넣음으로써 정착민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착민들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에서 누가 이기든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이길 경우 이들과 한 편인 인디언들이 정착민들을 상대로 잔혹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로 학살사건에서 살해된 영국군은 대략 200명 안팎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당시에는 수천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소문이 났고, 또한 인디언이 먼로장군의 심장을 꺼냈다는 것과 같은 끔찍한 소문도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에서는 프랑스가 승리했지만,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고 알려진 이 전쟁의 최후 승자는 영국이 되면서 미국과 캐나다의 식민지는 온전히 영국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된다.

 

요새에서는 하루에 네 차례 무기에 관해 설명해 주는 시간이 있다. 설명을 맡은 가이드는 그 말투부터 시작해서 설명하는 내용들이 거의 코미디언 급이다. 재치있는 유머를 적절히 섞어가면서 설명하는데 관람객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에 쓰이던 화승총과 대포를 이용한 발사  시범이 이어진다. 물론 총알이나 포탄을 넣지 않고 화약도 적은 양만을 사용해서 실제 위력보다는 완화된 형태이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시범이었다. 딸 아이가 화승총과 대포를 실제로 발사하는 장면을 처음 본다고 얘기하는데, 나도 그렇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두 번째 방문지는 이로쿼아 뮤지엄(Iroquois Indian Museum)이다. 이로쿼아 인디언들의 주거특징인 롱하우스(long house)의 모양을 본떠 만든 박물관의 외관은 그럴듯 했는데,  전시물들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설명을 들어보니, 이곳은 이로쿼아 부족이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인디언 보호구역에 위치하고 있지도 않았다. 인디언 예술품에 애정과 관심을 가진 한 개인(인디언이 아님)이 운영하는 사설 박물관이었다.


직원에게 이로쿼아 부족이 직접 운영하는 박물관이 있는지 물어보니 아는 바가 없단다. 어쨌거나 괜찮다. 내일 이로쿼아 동맹 중의 하나인 세네카 박물관을 방문할 계획이니 거기서 확인해 볼 수 밖에. 그곳은 제대로 된 곳이기를 바란다.

일단 얘기가 나온 김에 이로쿼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 가는 편이 좋을듯 싶다. 실상 이로쿼아는 하나의 부족이 아닌 5개 부족의 동맹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적,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뉴욕주 북부지역의 5개 부족(세네카, 카유가, 오논다가, 오네이다, 모호크 – Seneca, Cayuga, Onondaga, Oneida, Mohawk)은 연맹체를 결성하고, 각 부족들의 대표들이 모여 전체 동맹체의 주요 결정을 내리는 일종의 대의 민주정치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추후 투스카로라(Tuscarora)족이 합세하여 6개 부족 동맹체로 확대됨).

티로쿼아 연맹의 5대 부족과 인근 부족들의 위치


식민지 13개 주가 독립하여 연합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미국의 지도자들이 이로쿼아 정치체제를 참고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로쿼아 동맹의 얘기는 내일 본격적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이로쿼아 동맹의 부족들은 미국 식민지가 영국을 상대로 벌인 독립전쟁에 휩쓸리게 되고, 그 결과 미국이 승리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영국과 모호크족의 연합군이 뉴타운전투(Newtown Battle)에서 패배하면서 이로쿼아 동맹부족 지역은 미군에 의해 초토화되는데, 우리는 내일 이 전투지를 방문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로쿼아 동맹 부족 중의 하나인 세네카 박물관도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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