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떠나기 전, 아내와 딸은 쇼핑 break time을 가졌다. 그런데 몇 시간을 돌아다니는데도 별로 사는 것이 없다. 아이쇼핑만으로도 괜찮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것이라고 믿어야겠지?
맨해탄으로 입성했던 토요일 저녁, 코리아타운에 식사하러 갔다가 한국식당마다 현지인들이 밤 늦게까지 줄을 서있는 상황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는 한식은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것이 아닌 제대로 만든 한식 그 자체였고 가격도 결코 싸지 않았다. 한식의 밝은 미래를 보는 느낌이었다. 뉴욕을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한식으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다음의 맛난 한식 일정은 언제일지 모른다), 뉴잉글랜드 지방에 해당하는 코넷티컷주로 이동했다.
이 지역에 뉴잉글랜드라는 이름을 붙인 이는 제임스타운을 멸망에서 구원했던 바로 그 존 스미스이다. 불의의 사고로 부상을 입어 제임스타운을 떠나야 했던 존 스미스는(day 21) 이후 이곳 미국의 북동부 해안을 정찰한다. 그는, 이곳의 지형이 험하고 춥기는 하지만 도처에 널린 바위와 울창한 숲은 훌륭한 건축자재가 될 수 있고, 생선과 랍스터, 조개와 같은 수산자원이 풍부하며, 원주민들이 우호적이라 식민지 개척에 적합한 장소라고 기록했다. 그 자신은 이 지역 식민지 개척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이 곳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그가 만든 세밀한 지도를 참조했다.
하지만 실제로 존 스미스가 이 지역을 최초로 정찰한 것은 아니었다. 1602년에 바르톨로뮤 고스놀드(Bartholomew Gosnold)라는 영국인이 식민지 건설단을 이끌고 오늘날 메사추세츠 지역에 도착한다. 모래톱이 길게 나와있는 지역에서 생선을 많이 잡게 되어 그곳을 케이프코드(Cape Cod - 대구곶)로 명명하였고, 인근의 아름다운 섬은 딸의 이름을 따서 마사스 빈야드(Martha’s Vineyard – 마사의 포도밭)라 이름 붙인다. 이 지역의 명칭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뉴잉글랜드 지역 부호들의 별장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이 식민지 건설단은 연안의 섬에서 많은 양의 사사프라스(sassafras)나무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사사프라스 나무는 당시 유럽에서 퍼지기 시작한 매독병의 치료제로 알려지면서 그 가치가 급등하고 있던 식물이었다. 이들의 원래 계획은 이곳에 정착기지를 건설하여 사사프라스나무나 기타 자원을 확보하는 사업을 벌이는 것이었는데, 보급품 부족과 이번에 확보한 사사프라스 나무에 대한 이익 배분 등의 문제로 인해 결국 모두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제임스타운에 영국인들이 발을 내디딘 것이 1607년이었으니, 고스놀드 개척단이 계속 정착했더라면 제임스타운의 명성은 이들의 몫이 되었을 수 있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 및 그 북쪽의 캐나다 북동부 해안은 대구, 고래 등의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유럽의 원양어선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었다. 아직 냉장, 냉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생선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에서 바로 소금에 절여 보관하는 것(wet fishing)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일부 선원들은 해안에 상륙하여 생선을 건조시킨 뒤 다시 유럽으로 운송하는 방식(dry fishing)을 개발하게 된다. 또한 고래의 경우에도 포획 이후에 이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육상작업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유로 이미 1500년대 후반부터는 캐나다 북동부 지역에 많은 유럽인들이 여름철에 해안에 상륙하여 기지를 건설하고 머무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들은 영구적인 정착지가 아니라 일시적인 작업기지에 불과했고, 이들이 떠나고 나면 원주민들에 의해 다시 파괴되곤 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 지역 대구 건조기지 그림
이러한 어업기지 활동을 통해 1500년대 후반부터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도 원주민과 유럽인의 접촉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전염병의 발병이 해안지역 원주민 마을들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일부 원주민들은 유럽 선원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기도 한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메사추세츠 해안가에 파툭셋(Patuxet)이라는 번성한 원주민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 청년이었던 티스콴툼(Tisquantum)은 1614년에 유럽 어선에 붙잡혀 스페인에서 노예로 팔리게 된다. 이 파툭셋 마을과 티스콴툼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하는 청교도들의 구세주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해당 지역 방문시에 좀 더 다루기로 한다.
오늘의 숙소는 코넷티컷주 미스틱(Mystic)이다. 이곳은 수족관, 해양박물관 그리고 뉴잉글랜드풍의 부둣가 거리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하지만 17세기에는 피쾃(Pequot) 부족 지역이었고, 1637년 영국인들 및 이들과 연합한 다른 인디언 부족들에 의해 피쾃부족민 수백명이 학살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피쾃부족은 당시 영국인들과의 전쟁으로 부족이 거의 소멸위기에까지 몰리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폭스우드 카지노(Foxwood Casino)를 운영하는 주체로 다시 번성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우리는 피쾃부족 박물관을 이틀 후 방문할 계획이다.
이곳을 떠나게 되면 다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대륙을 횡단하고 난 뒤 서해안의 시애틀이 될 것이다. 먼 길이다. 떠나기 전에 해산물을 실컷 먹기로 한다. 저녁 메뉴는 굴, 홍합, 랍스터이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미스틱 피자(Mystic Pizza) 가게가 보인다. 난 본 적이 없는데, 아내와 딸이 줄리아 로버츠가 나왔던 영화 제목이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지 못한 내게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