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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o Lee Dec 02. 2019

Day 24 맨하탄에 뉴네덜란드가 들어서다

뉴네덜란드 vs. 뉴잉글랜드, 뉴암스테르담 vs. 뉴욕

뉴욕은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내가 살았던 곳이다. 그 이후에도 출장 등의 이유로 자주 방문하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온전히 여행객의 모습으로 와서 지내기는 오랜만이다. 그 동안 맨해탄 하면 의례 떠오르는 곳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5th Avenue, 센트럴파크, 타임스퀘어, 현대미술관(MOMA – Museum of Modern Art)과 같은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곳을 방문했다.


허드슨야드(Hudson Yards)와 하이라인공원(High Line Park). 이미 뉴욕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많이 알려진 곳이라 이들 장소를 새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동안 서울역 고가차도에 만들어진 공원이 바로 이곳 뉴욕의 하이라인공원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직접 이 둘을 비교해 보면서, 고가도로에 사람이 걸어 다니도록 했다는 점만을 빼 놓고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라인공원은 2킬로가 넘는 길을 걸으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도록 공원 구석구석에 재미있는 요소들을 심어 두었고, 일부 구간은 큰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을 걷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도심 속의 공원이랄까? 그러나 서울역 고가차도에는 이 느낌이 없다. 무언가 성공적인 것을 벤치마킹할 때에는 그것이 성공적인 이유를 이해하고 이를 구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 형식만을 베끼면 이같은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뉴욕에 온 김에 이곳 역사를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관광객 모드인 오늘은 인디언에 대해 할 얘기가 없다고 하니 아내가 제안한 주제이다.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뉴욕은 1524년 이탈리아인 베라자노(Verrazzano)가 이곳을 항해하면서 처음 유럽인에게 알려진 것으로 되어있다.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유럽인을 처음 마주친 순간이다. 이후 네덜란드가 영국인 허드슨(Hudson)을 고용해서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탐사를 맡기는데, 그는 처음에 스칸디나비아반도 북쪽을 지나는 길을 찾다가 얼음에 막혀 포기한 뒤, 미대륙을 통해 서쪽으로 나가는 항로를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지금의 허드슨만(Hudson Bay)에 들어와 큰 강을 따라 올라가게 되는데 상류에서 수심이 얕아지면서 결국 탐사를 포기하고 만다. 이들의 이름은 각각 베라자노대교(Verrazzano Bridge – 스테이튼 아일랜드와 맨해탄을 잇는 다리), 그리고 허드슨강(Hudson River)으로 남아있다.


허드슨은 탐사보고서에 허드슨강 지역의 원주민들이 우호적이고 토지가 비옥한 것으로 기록하였고, 이 후 네덜란드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해당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뉴네덜란드라고 불렸던 식민지의 영역은 한 때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코네티컷 주를 포함하는 큰 지역이었다.


뉴네덜란드의 초기 사업은 주로 허드슨강 북쪽에 거주하는 원주민들과 동물가죽을 교환하는 것이었고, 최초의 요새도 허드슨강 북쪽에 건설된다. 이후 해상 교역이 중요해지면서 1625년에 지금의 맨해탄섬에 Fort Amsterdam이 설립되고 이 지역은 이후 뉴암스테르담으로 명명된다.


뉴네덜란드를 관리하던 서인도회사는 정착민들이 땅을 소유하고자 할 경우 해당 지역의 원주민으로부터 구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맨하탄섬은 당시 60길더의 가치에 해당하는 물품을 그곳의 원주민에게 주고 구매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0길더의 가치를 달러로 환산하면 24달러라는 기록이 있어서, 이후 맨해탄은 24달러에 거래된 섬으로 알려지게 되지만, 실제로 당시의 60길더의 가치가 오늘날 화폐로 얼마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 듯 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 범주는 수천 달러에서 수만 달러에 불과하므로 헐값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당시 원주민들은 땅의 소유권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실제로 이들은 그냥 종이에 그림 그려주고 그 대가로 선물을 받은 것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이 거래후에도 원주민들은 이전처럼 수시로 들락거리며 사냥을 하곤 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인들이 원주민들로부터 맨해탄을 구입하는 장면 그림

뉴네덜란드의 정착민이 늘어가면서 인근 원주민들과의 갈등도 커져가는데, 급기야 당시 뉴네덜란드의 총독이 인근 원주민들에게 세금(공물)을 부과하기 시작하자 전쟁이 시작된다. 1655년부터 1664년까지 세 차례 전쟁이 있었는데, 이 중 두 번째 전쟁은 한 인디언 여인이 정착민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가져갔다가 살해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복숭아전쟁 – Peach War라고 불림). 이에 분노한 원주민들이 뉴암스테르담까지 공격해서 결국 그 살해범을 찾아내 죽이고야 만다. 이러한 양측의 전쟁은 서로 상대방의 마을을 파괴하고 학살하는 양상을 지속한다.


이후 북쪽에 설립된 영국의 뉴잉글랜드 식민지가 남쪽으로 확장되어 오면서 뉴네덜란드의 영역은 지속적으로 영국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고, 이에 대한 방어책으로 섬의 남쪽에 방책을 두르는데, 여기서 지금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 – 장벽거리) 이름이 유래한다. 결국 1664년 영국의 대규모 함대가 뉴암스테르담을 포위하고, 병력에서 열세인 뉴네덜란드 총독은 영국군에 항복한다. 그리고 영국은 이 지역을 뉴욕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네덜란드는 1673년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일시적으로 뉴욕을 되찾기도 하지만 1년만에 다시 영국에 내어준다.


영국의 뉴잉글랜드 식민지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온 이민자들로 시작했지만, 사실 종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뉴네덜란드가 더욱 관용적이었다. 지금 뉴욕 맨해탄을 보고 있노라면, 미국 건국이념이었던 청교도 정신보다는 네덜란드의 다양한 사상, 종교, 민족의 포용 정신이 더 많이 느껴지기에 어쩌면 이곳의 정신은 뉴욕보다는 뉴암스테르담에 더 가깝지 않은가 생각해보게 된다.


내일은 뉴욕을 떠나 코네티컷으로 이동한다. 서부로 향하는 대장정을 이틀 앞두고 있다.


아 참, 아내가 맨해탄이 인디언 이름이라는데 한 번 알아보라고 한다. 확인해 보니 당시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이 지역을 부르던 이름인 Manna Hatt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원주민말로 ‘언덕이 많은 섬’이라는 뜻이었다는데 지금은 빌딩 숲에서 언덕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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