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양이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1인용 감성>

by 재홍



지난봄 비염 수술을 받으러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코 상태를 보며 숨을 어떻게 쉬었을까 의아해했다. 어떻게 쉬긴… 입으로 쉬었지. 알레르기 검사에서는 무려 12종의 양성 반응이 나왔다. 그중 하나가 고양이 털 알레르기였다. 같이 산 게 몇 년인데 고양이 털 알레르기라니. 함께한 햇수를 꼽아보며 고양이가 이미 떠나고 없는 집으로 돌아왔다.


물루라는 고양이를 사랑한 장 그르니에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과 이기주의자들은 고양이를 좋아한다’라고 했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타인 앞에서 수전노처럼 감정을 꿍쳐놓기만 하는 내가 고양이 앞에서는 아이돌 손 한번 잡아보려는 팬의 심정으로 사랑을 바쳤다. 이처럼 우아하게 남의 사랑을 받아내는 생물이 또 있을까. 나는 왜 고양이처럼 태어나지 않았을까.



평면 TV라서 미안해


배만 하얗고 다른 곳은 황색과 검은색으로 얼룩덜룩한 일명 ‘삼색이’ 고양이. 녀석이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미리 준비해둔 배변용 모래에 오줌을 눈 것이다. 훈련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끼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발로 모래 위에서 사부작거리는 꼴이 신기했다.

“가을에 데려왔으니 가을이 어때?”

고양이를 들이는 일을 탐탁지 않아 했던 엄마가 손바닥만 한 녀석을 보고 마음이 누그러져 말했다. 낙엽이 내린 듯한 털 색깔과 사뭇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큰 쥐만 하던 가을이는 어느새 새끼 호랑이만큼 커졌다. 군말이 아니라 집에 오는 손님마다 웬 호랑이가 있냐며 놀랐다. 시간대별로 집 안의 따뜻한 곳을 순례하던 가을이는 주말 저녁 예능으로 달아오른 브라운관 TV 위에 드러눕기도 했다. 가끔 화면 위로 척 하고 꼬리를 내릴 때면 우리 가족은 외쳤다.

“야, 꼬리 치워!”

녀석이 지금 우리 집 거실에 있는 평면 TV를 보면 적잖이 실망할 것이다.



집사 겸 침대


평소에 사료 먹을 때 아작아작하고, 모래로 볼일 덮을 때 사락사락하는 것 외에는 소리라고는 내지 않는 녀석이었다. 가을이는 늘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렇기에 가을이가 내 옆에 와 있으면 내가 불러서 온 건지, 지나가다 들린 건지 알 길은 없다.


집사들은 고양이가 자신의 무릎 위에 앉는 것을 은총이라 여긴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주로 누워 지내는 편이라 가을이는 내 무릎이 아닌 가슴팍에 앉아서 졸곤 했다. 가을이의 낮잠에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 당당한 게으름이 부러웠다. 낮이 긴 여름이면 가을이는 시원한 베란다 타일에 엎드려 온몸으로 태양을 맞이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앙다문 모습은 마치 열반에 이른 고승이 세상의 시름을 볕에 말리는 것 같았다.



애정의 균형 감각


가을이는 사랑을 받는 것만 익숙했던 어린 나에게 사랑을 주는 일 또한 황홀하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분명 가을이도 나를 좋아했을 것이라 믿는다. 가족 중에서 내가 그나마 가을이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자기밖에 모르면서 남의 사랑을 받아내는 신묘한 애정의 균형 감각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왜 고양이처럼 살 수 없을까. 역시 외모가 중요한 걸까.


가을이를 보면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만이 보일 수 있는 표정이 뭔지 알 수 있었다. 타인의 애정에 고마워하되 목말라하지 않는 우아함. 묵묵히 자신에게 몰두함으로써 남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애정을 끌어내는 고고함.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인정과 애정에 울고 웃는 지금의 내 모습은 개와 같다. 개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고양이 같은 얼굴이 갖고 싶다.



가을이 갔다


나는 가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군대에 갔다. 가족은 내가 군대를 다녀올 동안 외할머니 댁에 가을이를 맡기기로 했다. 할머니 댁은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 주택이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가을이가 온 날 온 동네 고양이들이 집 근처를 기웃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거실 창문 사이로 나간 가을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첫 휴가 나온 날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군대 첫 휴가를 어떻게 보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가을이가 사라진 지 10년이 다 돼간다. 하지만 지금도 몹시 추운 날이면 집 나간 가을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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