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7월 3주 차
오늘은 할머니의 86번째 생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작년보다 안색이 좋아졌고 식사도 나보다 잘하셨다. 말씀도 표정도 또렷했다. 마치 치매에 걸리지 않은 사람 같았다.
할머니는 5년 전 다리 골절 수술 후 급격히 쇠약해졌다. 당신은 다리 때문에 밤낮없이 고통에 시달렸다. 부러진 몸의 고통에 마음도 부러진 걸까. 병원에서 치매 검사를 권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를 치매 전문 병원에 모시고 갔다. 검사 결과, 치매 초기였다. 평소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가 짤막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아 슬프다.
아버지는 이제 곧 할머니 속에는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을 빼고는 안 남을 거라고 했다. 기억력이 워낙 좋아서 전화번호 수첩도 필요 없다던 당신이었다.
사랑과 같은 작은 단어 하나로 가족에 대한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순 없을 것 같다. 감정을 넘어 가족은 몸의 일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엔 잊고 살아도 막상 문제가 생기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괴롭다는 점에서 그렇다. 조금만 닿아도 찌르는 듯한 상처의 통증처럼 말이다.
소주 한 병을 따르면 대강 일곱 잔 반 정도가 나온다. 소주 회사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는 음모론도 있다. 일곱 잔 반이라는 절묘한 양 때문에 둘이 먹든 셋이 먹든 자연스레 한 병 더 주문하게 된다는 게 이유다.
사실 소주 한 병이 일곱 잔 반인 이유는 ‘홉’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46년까지 홉, 되, 말을 썼다. 1924년에 나온 진로 소주는 두 홉들이였다고 한다. 국제 표준 단위를 쓰기 시작하면서 두 홉은 360밀리미터로 바뀌었다.
김빠지게도 한 병이 두 홉들이라 일곱 잔 반이었다. 그럼에도 달이 밝아서, 비가 와서, 잔이 반만 차서 같은 운치 있는 변명 하나 없으면 주당이라고 할 수 없지. 그러니까 사장님, 한 병 더 주세요.
'다르다·틀리다' 만큼 많이 틀리는 게 '이에요·예요'다. 파고들면 복잡하니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냥 단어에 받침이 있으면 '이에요', 받침이 없는 나머지는 '예요'라고 외우는 게 편하다. 그래서 받침이에요, 나머지예요.
거에요, 뭐에요 (X)
것이에요 = 거예요 (O)
뭣이에요 = 뭐예요 (O)
'거에요·뭐에요'가 흔한 오류다. '것·뭣'은 받침이 있으니 '이에요'가 맞다. '거·뭐'는 받침이 없으니 '예요'를 붙인다.
박재홍이에요 = 박재홍+이에요 (O)
재홍이예요 = 재홍이+예요 (O)
이름 때문에 많이들 헷갈린다. 받침이 있는 이름에 '이'라는 접미사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재홍이'는 받침이 없으니 '예요'를 붙인다.
아니에요 = 아녜요 (O)
아니예요 (X)
그래도 헷갈린다면 이렇게 외워보자. '에요'라고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에요' 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예요'다. 사실 예외 규정이 더 있지만 너무 복잡해진다. 이 정도만 지켜도 틀릴 일은 거의 없다. 참고로 '아니에요'의 준말은 '아녜요'다.
"나는 밤하늘의 별과 내 몸이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위로를 받았다.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삶이 덜 외롭고 덜 허무해 보였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과학과 문학의 샐 틈 없는 결합, 물 흐르듯 읽히는 문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생각났다.
<작별인사>는 차가울 정도로 담백한 공상과학소설이다. 동시에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아무래도 동화가 작가의 도덕률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품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느냐는 오래된 물음을 다룬다. 그리고 끄트머리에 이르러 내민 답은 광막한 밤하늘에 그어진 혜성의 꼬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김영하 작가는 인류의 마지막 기계 속에 인간다움을 심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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