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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22년 8월 3주 차

by 재홍

망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1

재작년에 전동킥보드로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걸어서 사고 현장을 떠났으니 운이 정말 좋았다. 그러고 몇 개월 뒤 전동킥보드 헬멧 착용 의무화가 시행됐다. 사고 난 뒤부터 전동킥보드를 탈 때 헬멧을 꼭 썼기에 좋은 사업 기회 같았다.


결국 작년 초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직접 사업계획서를 쓰고 프레젠테이션도 했다. 운 좋게 중소벤처기업부 지원 사업에 합격했고 5천 5백만 원 지원을 협약했다. 현금을 주는 게 아니고 비용을 청구하는 방식이라 결국 다 쓰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원금으로 유명한 산업 디자이너한테 의뢰해서 제품을 디자인했다. 3D 프린터로 목업도 만들고 벌집 구조를 응용한 내피도 특허 등록했다. 사업은 나름 그럴듯해 보였다. 그런데 제조를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새롭게 디자인한 내피를 만들 수 있는 곳이 국내에는 없었다.


가뜩이나 제조업이 처음인데 중국에서 금형을 만들어야 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눈을 감고 말이다. 그리고 금형 제작을 한 번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수천만 원짜리 금형을 몇 번이고 다시 만들어야 할 수도 있었다.


지원금은 물론이고 모아둔 돈으로도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잘 굴러가던 사업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망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2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 없거나 말도 안 되게 비쌌던 경험이 많이들 있을 것 같다. 플라스틱 제품의 경우 기존 제품과 다른 걸 만들려면 금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 비용을 맞추기 위해서는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팔리면 다행이다. 안 팔리면 금형 제작에 든 수천에서 수억 원을 날려야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왜 다들 중국에서 물건을 떼어다 이름만 바꿔서 파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금형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 시작하기 전에 생각해야 했던 문제였다. 그런데 시작할 때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성공할까, 성공하면 얼마나 좋을까 따위만 생각했다. 성공에 앞서 실패를 먼저 준비해야 했는데 말이다.


뒤늦게 실패를 생각하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전동킥보드 헬멧 착용 의무화를 해도 사람들은 헬멧을 거의 쓰지 않았다. 기성 금형을 쓰면 차별성이 없어졌고 금형을 새로 만들면 값이 너무 올라 가격 경쟁력이 없어졌다. 애초에 해야 했던 고민이었다. 결국 제품은 만들지도 못하고 반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헬멧을 쓰는 이유는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고가 날 거라 생각조차 안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 어리석은 일을 내가 했다. 많은 시간과 큰 비용을 들여서 말이다. 덕분에 인생에도 헬멧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중복된 말

다이어트 3


함께 동행하다 (X)

> 함께 가다

> 동행하다


동행의 뜻이 '함께 가다'므로 '함께 동행'은 중복된 말이다.



그때 당시는 그랬다 (X)

> 그때는 그랬다

> 당시는 그랬다


당시는 '(어떤 일이 생긴) 그때'를 뜻하므로 '그때 당시'는 중복이다.



과반수를 넘다 (X)

> 반을 넘다

> 과반수다


과반수는 반을 넘은 수이다. 그래서 과반수를 넘다는 '반을 넘은 수를 넘다'라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로 '과반수 이상'이라는 말도 중복이다.



같은 뜻이 중복된 말을 ‘겹말’이라고 한다. 흔히 고쳐야 할 글 습관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겹말 중에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된 것도 많다. '족발' 같은 말이 그렇다.



겹말을 아예 안 쓰는 것보다 알고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박수 치다’를 ‘박수하다’라고 쓰면 오히려 어색하지 않은가.



카피를 쓰다 보면 토씨 하나라도 줄여서 간결한 문장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겹말이 다이어트 1순위다. 하지만 쉽고 편하게 읽히는 글을 쓸 때는 오히려 겹말을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편이다.




인스타그램에 매일 연재하고 있습니다.

@jaehong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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