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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May 14. 2023

완연한 혼자만의 시간

생각 노트 #26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혹은 '인생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두 문장은 대립적으로 보인다. 각자의 상황, 처지를 아끼는 수단으로 흔히들 음용하는 통념이라 할 수 있겠다. 삼키기 어려운 거대한 알약을 식도로 넘기는 부단한 노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는, 다른 맛을 가진 과일들 같다. 색과 향, 모양이 모두 다르고 익히 아는 맛이지만 마음과 생각에 닿을 때는 고유한 무언가를 전달하는, 받아들이고 읽는 자의 가능성에 맡기는 것들로도 생각할 수 있겠다.


혹은, 일단은 두 녀석의 느낌부터 다르다. 앞은 단언하고 확실한 반면에 뒤는 회한과 득도가 담겨있다.


이것 또한 모호하다면 한 가지의 문장으로 읽어볼 만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나, 인생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느낌이 색다르다.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현실에는 좌절해야만 하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교류는 당연한 욕망이지만 고난이 많아 보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산등성이에서 수분을 위한 흐릿한 과일을 음용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좋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를 위해서 다른 이와 접촉을 갖는 게 좋았다.


 어릴 적부터 극도로 낮은 자존감과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설계받았기에, 작은 실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가슴속에서는 태풍이 몰아쳤다.


 결국 나를 제외한 이들은 내 이유가 되었다. 사랑, 우정, 동경, 존경, 경외 혹은 혐오, 미움, 질투, 시기 모든 감정들은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밝은 것들을 쫓아 그들을 닮으려고 했고, 어두운 것들을 내쫓으려고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고 밀어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어도 나를 표명할 수 있는 존재는 내 안에 없었다. 우주 같은 검은 바다에도 나룻배 한 척이 없었고, 하얀 설원에는 뛰노는 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그들을 닮고 배우고자 한다고 하여도 3인칭이라는 것을. 나는 주연도 조연도 아닌 관찰용 카메라이자 편집되는 필름에 불과했다.




 그래서 검은 붓으로 나를 세웠다. 흐리멍덩하고 윤곽선 또한 잡히지 않았지만 소중한 창조물이자, 주인공이었다.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허술한 실력에 나는, 가장 중요한 심장을 그려내지 못했다.


 비루한 아이는 고독감에 몸서리쳤다. 지켜보는 이도, 태어난 이도 같은 감정과 고동을 지녔지만 갈증은 메꿔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창 밖을 지나가는 이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굳이 들어오지 않아도, 지나가는 이들의 손에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씩 쥐어주었다. 호객 행위 또는,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는 결국 좌절감만 연속적으로 맛볼 뿐이었다. 비슷하지만 어딘가는 하나씩 다른, 처참함의 연속이었다.




 결국에는 창문을 닫았다. 찾아온 암전과 함께 붓의 색과 구별이 가지 않는 시야가 들어왔다. 나는 그곳에서 존재했던 세계를, 방금 전까지 감각했던 것들을 의심했다.


 의심하니 잡히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느린 속도로 모든 것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문득 산들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지저귀는 소리와 달콤한 향기도 스쳤다. 그래서 눈꺼풀을 당겼다.


 어느덧 나는 밖에 나와 있었다. 지나다니는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비릿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에게 독이 되는 것들은 이제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이제는 나 또한 길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길이든 덤덤하게 걸을 수 있는 대범함을 지니게 됐다.


 나를 굳이 표방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동안 건네었던 초대와 수많은 것들이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그 조각들로 쌓아 올린 지금을 축복하기에 미련은 없다.




 지나다니다 보니 몇몇 암굴이 보였다. 아주 작거나, 혹은 악취가 밀려드는 곳도 있었다. 과거의 이채가 스쳤다. 먹히든 없애든 무너뜨리든 오로지 그들만의 길이기에, 조용한 끄덕임과 함께 다시 내 길을 걸었다.


 이제는 혼자 하는 것이 즐겁다. 혼자서는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던 과거의 자신에게 안도의 한 마디와 독려를 건넨다. 어떤 생각이든 행동이든 나를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둘, 혹은 다수가 싫을 수는 없다. 쉼표 이전의 것들이 증명하듯이 본능을 이기는 것은 없다. 훨씬 짜릿하고 풍족하며 만족스럽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결국이라는 말이 따라오지 않는가.


 수많은 산등성이에서 풀썩 주저앉아 울고 싶지 않다. 또한 멈춰서 퇴화하는 것이 몹시 두렵다.


 해와 달은 매번 바뀌며 떨어지고 피어나는 나뭇잎의 개수 또한 달라진다.


 그렇기에 수십 단의 강철 같은 볏짐을 매었어도 웃음이 난다. 혼자면 좋고, 둘이면 더욱 좋을 것이며, 우리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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