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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Jan 14. 2024

빛바랜 화원을 어루만지다

생각 노트 #30

 오랜만에 책을 구웠다. 아주 뜨겁진 않더라도 적절한 온기로 달궜다.


 아주 어릴 적에 읽었던, 나를 처음으로 글에 빠져들게 해 준 거대한 책이었다.




 그때는 담쟁이가 오를만한 높이의 벽도 없었다. 그저 펼쳐진 황야에 미약한 바람만 떠돌고 있는, 순수하고 공허한 어디였다.


 아주 커다란 무엇인가가 쾅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방위를 종잡을 수 없는 이곳에 구심점을 세웠다. 연녹색의 동그란 식물줄기였다. 그 위로는 더욱 넓은 무엇인가가 둥글게 활짝 펼쳐져있었고, 덕분에 햇빛을 피할 쉼터를 얻게 되었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었다. 난생처음 그림자를 두 눈으로 보았고 신기하여 여기저기 뛰놀았다. 배가 고프면 식물줄기를 잡아 뜯어 마음껏 허기를 달랬다. 심심한 식감에 단물이 나오는 그런 종류였다.


 입에 잘 맞았다. 크기도 워낙 거대해 나를 지켜주기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마치 충직한 기사의 이미지였다. 어린 나는 사랑에 빠졌고, 그림자 가장자리를 따라서 울타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둥그란 화원을 완성했고 내 화원의 이름을 공표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형형색색의 식물덩이들이 낙하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다. 그때는 내 세계보다 거대한 세상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 나이에 끼니가 귀찮고 잠이 오질 않았다.


 불현듯 찾아온 신비함 그득한 세상을 구경하느라 머릿속 서재가 분주했다. 모든 걸 이해하진 못했지만 내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의 화원에는 색이 칠해지고 소박한 푯말이 붙었다.

 



 재밌었다. 그때만큼 책에 빨려 들어갈듯한 흡입력은 아니었으나 퍽이나 흥미진진했다.


 모든 에피소드와 결말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다짐과 읽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때만큼의 신선한 충격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걸어온 길에 우두커니 서서, 나아갈 미래보다 지났던 과거에 미련이 남는 것은 아닐까. 과거보다 더욱 찬란한 미래를 그릴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가진 현재의 솔직한 내 모습일까.

 



 빛바랜 것은 둘러싸고 있는 벽돌에 불과하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거대한 잎사귀는 나를 여전히 반겨준다. 이제는 식물줄기를 뜯기에도 망설임이 가득한 나에게, 꽃망울은 영원한 웃음을 짓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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