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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모어책방 Oct 21. 2020

나쁜 질문은 없다

질문하는 클라이언트만 성장하는 이유

글이 드문드문했다. 정신없는 4개월을 보냈는데 할머니가 위중하셔서 한국에 갔고, 한국에 있는 동안 일을 했고, 돌아와서는 집 계약 마무리를 했고, 공사를 했고, 이사를 했고, 정리를 했고. 휘유. 어떻게 시간이 간 지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기억도 어스름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매일 달리기를 하듯 꾸준하지 못하고 김영하처럼 일단 첫 문장을 쓸 만큼 과감하지 못한 나의 글쓰기는 그래서 미뤄지고 미뤄지다 어느 날 충동적으로 써 내려간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여러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내게는 익숙해진 이야기이다. 영국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누구나 그랬듯 나 역시 생각과 두려움이 많았다. 특히 처음엔 클라이언트들과 통화를 하는 것만으로 울렁증이 있었다. 통신사 G와 통화를 하는 목요일이면 늘 기도를 하면서 출근하던 아침 기차에서 바라보던 윈저성. 해외에서 살아본 적도, 공부해 본 적도 없는 나의 시작은 그 누군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전제는 우위에 기초한 파트너십


한국 사람들에게 클라이언트들의 성장을 이야기한다면 너무 낯선 이야기일까. 한국에서 컨설팅 회사, 대행사에게는 클라이언트들이 가지는 일정의 위상(?)이 있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면 밤과 주말을 활활 태워서라도 요구한 일들을 끝내야 하는 것. 일단 거기에서 차이점이 있다. 영국은 에이전시와 클라이언트가 파트너십에 가까운 관계로 정의된다. 최근 내가 메인으로 리드하는 S 은행과의 annual meeting에서의 그들의 평가도 그러했다. '우리는 귀사를 전략적인 파트너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빈 부분을 메워주고 조언해주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파트너십으로 우리가 가지는 역할이 있다. 당연히 일정은 클라이언트가 일방적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에 따라 논의/협의를 거쳐 정해진다. 덕분에 나의 밤과 주말은 온전히 가족의 것이다.


여기에 귀중한 기초가 되는 것은 우리가 클라이언트들보다 소위 '많이 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재화는 지식과 경험이고, 이것이 사람을 뽑아서 시행착오를 겪는 비용보다 적게 드는 점이 파트너십의 기본이다. 그래서 이 곳 에이전시에서 사람을 뽑을 때 Job Description에 적힌 'client facing' 요건의 중의적 의미는, 단순히 에이전시에서의 경험뿐 아니라 에이전시에 일할만큼의 실력도 포함한다. 우리 업계 내에서도 스스로 포지셔닝을 이야기할 때 세일즈 역량을 고려하지만 그것이 메인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클라이언트들과의 관계는 꽤 건조한 편이다. 각자의 개인 생활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다. 가끔 오랜 클라이언트라면 회의 전에 조금 언급하는 정도이다.  

컨설팅은 질문하는 클라이언트와 함께 성장하는 것


그런 우리에게 클라이언트의 성장은 중요하다. 사실 처음엔 이 사실이 낯설었다. 클라이언트가 성장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는다는 것은 우리의 필요가 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성장은 우리로 하여금 더 복잡하지만 중요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데이터 분석과 관련한 트렌드와 키워드, 규제는 계속 변하고 있고 오히려 성장하지 않는 클라이언트들은 그들의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가야 하는 부담만 우리에게 지운다. 성장한 클라이언트들은 기초적인 것들은 스스로 해결하고, '더 나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 질문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더 나은 답변을 제공하기 위해 공부하게 한다. 그래서 클라이언트들의 좋은 질문은 컨설팅 회사로서는 금과 같다.


Google Analytics 360 등의 라이선스에 몇 억씩 붓는 큰 회사들이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큰 회사들일 수록 소위 digital transformation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왜일까. 막상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user의 세션이 다 fragemented 되어 있고, customer journey는 왜곡된 데이터들로 가득하다. hit volume만 크지 기본적인 UTM tagging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attribution modeling을 하는데 많은 추가적 시간과 비용을 써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이슈가 없냐고 물으면 다 괜찮다고 한다. 당연히 질문은 없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질문하는 클라이언트들, 아니 그런 클라이언트만 성장한다. 질문을 자주 하는 클라이언트들이 더 나은 질문을 할 가능성이 높다. 아마 스스로 반복되는 질문은 점차 피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그 가운데 본인들의 경험을 거치다 보면 점차 핵심에 다가가게 된다. 테스 형이 문답법을 중요하게 여긴 탓도 그런 이유겠지.


그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32년을 살았다. 카투사로 2년을 미군 부대에 있었던 시간을 제외하고 늘 한국 사람들과 살았다. 그런 내게 영국에 사는 동안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낙엽처럼 날아와 툭툭 부딪힌다.


Good question


특별하지 않은 질문에도 '좋은 질문이야'라니. 한국에서 회사 생활하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표현이다. 아니, 한국에서 공부하고 크면서도 과연 들어본 적이 있나 싶은. 그래서 종종 저 표현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경함은 나로 하여금 한국 사람임을 자각하게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정말 그 질문이 좋은 질문인 경우는 많지 않다. 가끔 내 기준에는 실소가 나오는 질문에도, 진지하게 답변을 하고 있는 여기 사람들을 보는 일은 꽤 흔하다. 거의 동어반복 수준의 질문을 하는 경우도 성심껏 대답하는 모습이라니. 오히려 나는 가끔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좀 짜증이 날 때가 있더라. 내가 해준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인지. 그런 나에게 아내는 한 마디, 여기에서 종종 쓰는 표현으로 날 깨우쳐 주었다. 'There is no silly question'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 곳 사람들. 생각해 보면 우린 늘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늘 누군가의 평가에 민감한 만큼, 질문하기 전 우리는 이미 두려워진다. 내 질문이 받을 평가에 대해서. 내 질문을 통해 해석될 나에 대해서. 내 질문을 통해 해석될 내가 가질 장벽에 대해서. 그래서는 도대체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좋은 질문은커녕, 어떤 질문도 차단 당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런 질문이 차단당한 이에게 성장이 없는 것은 아니나 더딜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금 반성한다. 한국에서 일할 때 반복되는 후배의 질문에 짜증을 냈던 내 모습을.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을 텐데. 나는 내 선배들의 내 질문에 대한 단호하고 차가웠던 비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 직장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그곳에서 가장 그만둬야 했던 것을 고민했던 순간은 다름 아닌 내가 면담 때 했던 질문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성장했던 때는 내가 가졌던 질문들을 친절히 답해줬던 한 친구와 업계에서 일하고 있던 선배들과 만나던 그 밤들이었음을. 그래서 언젠가 부족한 내게 주어질 질문들에 대해 성실할 것을 다짐한다, 늦었지만.


미리 이야기 하지만,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좋은 질문을 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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