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일할 수 있는 '문화' 이야기
코로나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확산되고 2월부터 영국에 확진자가 나왔다. 3월 초까지 출근을 하다가 중순부터 WFH (재택근무)을 시작했다. 코로나 이전에도 WFH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국의 지인들보다는 패닉이 덜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일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영국에서 느낄 때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 WFH인 것 같다. 동시에 가장 웃긴 순간이 동료들에게서 WFH (Work From Home) 이메일을 받았던 때였던 것 같다.
오늘 집으로 택배가 와서 집에서 일할게
택배를 받아야 해서 동료가 집에서 일한다는 게 처음 이해가 쉽진 않았다. 한국은 내가 집에 없어도 관리사무소에서 따박따박 받아주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보니 영국은 택배가 들쑥날쑥 오고 받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가져가 버린다. 심지어 택배를 받으러 히드로 공항에 가본 적도 있다 보니 동료의 이메일이 이해가 되었다.
오늘 아이가 아파서 집에서 일할게
육아를 하며 일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겪기 전에는 몰랐다. 따라서 아이가 아파서 집에서 일하는 것도 내가 경험이 쌓인 뒤로는 이해가 갔다.
이 아래부터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가는 사례들.
"감기가 걸려서 몸이 안 좋아. 병원 갔다 집에서 일할게" (뭐야, 왜 개인 휴가 써서 병원을 안 가지?)
"오늘 기차가 다 취소됐어. 집에서 일할게" (뭐야, 택시 타고서라도 와야 하는 거 아냐?)
"어제 잠을 잘 못 잤어. 아침에 좀 쉬고 집에서 일할게" (야 잠을 못 잤는데 왜 니가 출근을 못하냐)
"배가 아파. 집에서 일할게" (야 X 싸고 일단 와봐)
사실 우리 회사는 그래도 영국 회사 중에서는 근태관리를 꽤 엄격히 하는 편이다. 그리고 동료들 중에는 주기적으로 집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많다. 일주일에 하루가 가장 많고, 그 이상인 친구들도 있다. Industry와 상관은 있지만 크진 않은 것 같다. 교회의 지인은 세무사인데 일주일에 3번 집에서 일한다고 했다. 건축 쪽인 아내의 회사는 더 배려가 많은 편이어서, 작년에 아이가 아플 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비가 와서 산사태가 크게 났던 날, 출근을 하다 토사에 휩쓸려 기절을 했다가 기적처럼 사무실에 출근했던 한국의 전 직장 동료 이야기는 여기에선 다소 동화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한국에서 최근 확산되고 있는 WFH은 아무래도 처음 도입 시에 걱정이 많을 수 있다. 회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업무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스타트업을 할 때 늘 원격으로 일하는 동료들에게 어떻게 동기부여를 해야 하고 업무관리를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 면에서 WFH이 많지만 성장하는 지금 회사에서 일하면서 느끼게 된 점들이 몇 가지가 있다.
언제,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는 것은 흔히 도구가 중심이라 생각한다. 일리가 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주된 일에 쓰는 도구인 Google Analytics, Google Tag Manager 등의 Google Marketing Platform 내 제품들이나 이메일, 문서도구를 제공하는 G Suite이 없었다면 손쉽게 WFH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업무에 주로 필요한 도구들을 언제,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WFH의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조건이다.
이는 반대로 도구가 WFH의 핵심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제는 정말 어디에서나 업무를 할 수 있기에 편리한 도구들이 너무나 많다. zoom, Slack 등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는 스타트업은 물론, 큰 회사들도 잘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FH을 하지 않는 회사들은 흔히 보안에 대한 걱정이 제일 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각 회사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툴들은 Accessibility를 잘 통제하면 웬만한 사내 보안망보다 낫다. (i.e. 구글의 보안망 > 웬만한 회사 보안망)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가장 실질적인 이유는 '자율에 대한 불신'이다. 어떻게 자율적으로 잘 알아서 하게 할 것인가. 이는 문화가 해결할 수밖에 없다.
우리 회사는 단순하게 알아서 능동적으로 일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통상 영국 회사들은 4월에 새로운 회계연도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 직전과 직후에는 다소 일이 소강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 같은 컨설팅 회사도 그런 클라이언트들의 상황에 따라 비슷한 시기에 여유가 생긴다. 그럴 때 가만히 쉬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다.
'Proactively ask!'
(능동적으로 물어봐!)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수없이 듣던 이야기였다. 여유가 있을 때 주변 동료들에게 일 없냐고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농담이 아니다. 심지어 일일이 메시지를 보내 일 없냐고 거의 구걸(?)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았을 때는 우연히 peer review나 yearly review 시에 꼭 피드백을 듣게 된다. 덕분에 우리는 일이 없을 때 부담을 갖게 되고 자연스레 태만 대신 때로는 부산스러울 정도로 부지런을 떨게 된다.
이것은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시니어 A: "재호, 요즘 어때? 많이 바빠?"
나: "응, 클라이언트 1이랑 2 때문에 정신이 없네."
시니어 A: "아 그래? 그럼 클라이언트 2 일을 B (우리 회사 이사)에게 주는 게 어떨까? 요즘 시간이 있다고 나한테도 도움 필요하냐고 물어보더라고."
나: "..."
여기에는 Proactive 하게 일을 찾아보고 도움을 주려는 문화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직위에 상관없이 자신의 상태를 공유할 수 있는 수평적 문화도 중요하다. 자신이 여유로울 때 팀에 도움을 주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반대로 내가 바쁠 때 내 일을 주변 동료에게 나눠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종종 바쁘게 보여야 하는 한국의 문화에서는 이것이 부정적으로 여겨질 때가 있어 아쉽다. 또는 상급자가 스스로 감시자로서의 역할만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WFH이 모두에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micromanaging이라고 너무 자세하게 간섭하고 관리하는 것을 지양하려는 문화가 있다. 그러다 보니 WFH 하는 동료가 몇 시에 일을 시작해서 몇 시에 일을 끝내는지,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에 대한 관리는 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일하든 내가 맡은 일을 정해진 기한 내에 끝내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기둥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그 일정을 대략적으로 동료들이 알고 있다. 월요일마다 진행되는 Scrum에서는 회사 내 진행되는 모든 프로젝트들을 리뷰한다. 너무 작은 task는 올리지 않지만 일정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task나 R&D, 휴가까지 함께 리뷰하고 정보를 공유한다. 단순히 일의 진척만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일에 뭔가 장애물이 있다면 공유하고 함께 솔루션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일의 과정이 대략적으로 공유가 되고 집단이성으로 일을 끝내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 별로 Triage를 통해 1주일의 계획과 우선순위를 PM들과 상의한다. 두 가지 미팅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과정과 우선순위를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뿐더러 기본적인 내용들을 동료들과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둘째는 일의 결과는 팀원 모두가 접근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G Suite를 쓰는데 개인적인 파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팀 드라이브에 올려야 한다. (GDPR은 이 점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다) G Suite 내의 문서도구는 Version History 기능이 있어서 언제 무엇이 업데이트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한 일의 과정과 결과는 원하든 원치 않든 상세하게 공유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Lead와 Wingman이 있는데 내가 Wingman으로 직접 하지 않는 task라 하더라도 클라이언트와 공유하는 Asana, Basecamp 같은 프로젝트 관리 도구에서 함께 계속 업데이트를 받게 된다. 쉽게 말해, 나의 시니어라 할 지라도 그가 하는 커뮤니케이션 내용과 업무 결과가 나에게도 계속 업데이트가 되는 셈이다. (매우 귀찮을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은 일의 결과는 measurable 해야 한다. 모든 일에 적용하기 쉽지는 않지만 우리의 경우는 컨설팅이다 보니 시간당 비용이 발생한다. 시간(=비용)으로 시작해 클라이언트가 얻을 가치로 환산되기 때문에 꽤 직접적으로 나의 일에 대한 결과가 측정되는 셈이다. 사내에서는 Tick이라는 툴을 써서 이를 관리하는데 마찬가지로 팀원 모두에게 공유되고 billable hour (컨설팅비를 청구할 수 있는 시간)라는 회사에 대한 기여도를 기록하는데 도움이 된다.
작년에 일주일 중 하루를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집에서 일하려고 회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중 인상 깊은 대화가 있었다.
나: "아이가 아무래도 엄마 아빠와 더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집에서 하루 일해야겠어" (물론 이보다는 더 정중하고 감성적으로 이야기했다)
시니어: "그래. 아이를 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아."
작년 하반기 하루를 아이와 보내면서 너무 행복한 시간들을 많이 보냈다. 아빠로서 아이가 커가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남편으로써 아내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나에게 중요한 것을 이해해 주는 누군가였다. 위 대화를 나눈 시니어뿐만 아니라 회사의 대표, 그리고 프로젝트 매니저들, 다른 동료들까지. 그 누구도 내게 싫은 내색이나 불편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너무 이해하고 그것이 더 중요하다 말한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내 성격상 스스로 관두고 말았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문화적 요소들과 도구들에도 불구하고 WFH이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차 한 잔 할 시간도 더 주어지고 누군가 나를 지켜보지 않기 때문에 나른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된 것이다. 각자의 사정에 의해 WFH을 할 때는 어느 정도 퍼포먼스가 떨어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 다만 WFH을 해야 하는 상황- 아프든, 택배를 받아야 하든, 심지어 어제 잠을 못 잤든- 을 겪는 그 동료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에 내게 배려와 이해가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 회사 역시 배려와 이해를 통해 가족 중심적인 회사라는 생각을 구성원에게 심어주게 된다. 이는 이직이 빈번한 이 곳에서 주저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배려와 이해.
언제 봤던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는 드라마의 대사가 생각이 난다.
면접관: "마지막 면접 답변이 기억이 난다. 11년 살림한 경험이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된다. 우리 회사가 강단이씨한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죠?"
여주인공: "그게...우선 제 서류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예전부터..."
면접관: "아뇨, 현재의 강단이씨요. ... 감히 경력단절이니 재취업이니 하면서 멋도 모르고 소풍 가는 기분으로 오는 곳이 아니라구요 회사라는 곳이."
여주인공: "잠깐만요. 저 나름대로는 절박하게..."
면접관: "기분 나쁘게. 내가 어떻게 지킨 직장인데."
모두 지는 죄수의 게임이 아니라, 모두가 조금 더 이해해주어서 만드는 더 나은 결과. '너도 나만큼 힘들어봐야 해' 보다는 힘들었던만큼 이해해줄 수 있는. 회사는 그렇게 WFH을 빈번하게 하는 구성원을 두고도 Boots, Diageo, All Saints, giffgaff 같은 굵직한 클라이언트를 둔 회사로 잘 성장했다. 일정한 룰 안에서 이해와 배려는 나쁜 것이 아니다.